흙바람과 땀으로 뒤덤벅된 얼룩진 티셔츠를 조물조물 비비니 황톳빛 구정물이 나온다. 몇 번 헹구어 내자 아침에 입었던 하얗고 깨끗한 티셔츠로 돌아왔다. 거만한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기만하는 더러운 내 마음도 깨끗하게 돌아오길 바라며 나는 온 힘을 다해 빨래를 했다.
'탁! 탁' 물을 한가득 머금은 옷을 털어 빨랫줄에 널고 있는데 글로리아가 한 손에 맥주 한 병을 들고 옆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맘마미아!! 미쳤어? 그 발로 45키로를 걸어왔다고?" 그녀는 이미 다른 순례자들로부터 나의 길고 긴 하루에 대해 전해 들은 후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녀를 기만했던 행동으로 나는 그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애꿎은 빨래집게를 찾는 척을 하면서 대답했다.
"밥은 먹었어? 근처에 식당 있는데 같이 가자." 글로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 사실이 나를 더욱더 미안하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글로리아."
"응? 뭐가?"
"그냥. 며칠 전에 그렇게 가버려서."
글로리아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맥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아란, 나를 포함한 다른 순례자들도 너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어. 단지 스페인어도 못하고 발도 아픈 애가 잘 걷고 있나 걱정은 했지."
글로리아의 대답은 소용돌이치던 내 머릿속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동안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괴로워 한 것이, 사실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괴롭히며 어렵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말고, 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너의 길을 가. 아란!"
오후 7시. 스페인 햇살이 여전히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글로리아 덕분에 구겨지고 축축한 마음도 바짝 잘 마른 빨래처럼 보송보송해졌다.
"땡고 암브레.(나 배고파.)"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새벽 5시 30분. 전날 널어놓은 옷을 걷기 위해 마당으로 나갔다. 새벽이슬을 맞아 축축해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걷는다. 덜 마른 티셔츠와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전날 평소보다 2배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그런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글로리아가 나에게 묻는다.
"아란, 오늘 컨디션은 어때?" 아침에 일어나니 천근만근이지만 괜찮다고 대답한다. "비엔. 이 투?(좋아. 너는?)"
"좋지! 오늘 같이 걸을래?" 세심한 글로리아는 조심스레 물어보았고 대답 대신 나는 발을 글로리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제 너무 무리를 했는지 같이 걷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해."
"괜찮아. 그런데 마리와 기 커플이 내일 프랑스로 간대. 우리 그럼 레온 알베르게에서 만나자. 주소는 여기야."
글로리아는 알베르게 주소를 적은 쪽지를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콜!! 이따 만나." 산티아고 순례가 반정도 지났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시작했던 기나긴 여정, 이제 레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레온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세비야 같은 스페인 대도시는 아니지만 카미노에서는 로그로뇨, 부르고스와 함께 큰 도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레온까지 걷는 사람들과 레온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만남과 이별의 광장 같은 도시기도 하다.
프랑스 중년부부 마리와 기도 레온까지 걷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순례 초반부터 나를 딸처럼 생각해 준 감사한 분들, 작별인사는 꼭 하고 싶었다. 컨디션이 좋지는 않지만 남들보다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아스따 루에고.(이따 만나요.)"
'Poco a Poco(조금씩 천천히)' 빨리는 걷지 못하더라도, 남들보다 바지런히 서두른다면, 다른 사람과 엇비슷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을 내어 걷고 또 걷는다. 힘에 부치긴 했지만 나보다 앞서 걸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걷다 보니 'Leon'이라는 이정표가 눈앞에 보였다.
레온(Leon)은 '수사자'라는 뜻처럼 생각보다 큰 도시에 속했다. 글로리아가 적어준 주소를 들고 알베르게를 찾았지만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과 길치인 나에게는 알베르게를 찾기는 역부족이었고 지나가던 스페인 아저씨를 잡고 엉망진창 스페인어로 길을 물으며 쪽지를 내밀었다.
"올라! 페르도나. 요 끼에로 아끼.(안녕하세요. 저는 이 알베르게에 가고 싶어요.)"
땀을 뻘뻘 흘리고 절뚝거리며 걷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는 짧게 한마디 했다.
"팔로미."
그를 따라간다. 햇살 가득하고 기념품샵과 식당이 즐비한 넓은 광장을 뒤로하고 그는 어둑하고 그늘진 골목으로 안내했다. 주소와 알베르게 이름만 적힌 쪽지를 보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한줄기 의심은 거둘 수 없어 스스로를 위한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길 위에는 나쁜 사람은 없다. 나는 돈이 없다. 털릴 것이 없다.'
한적한 골목에 아저씨는 발걸음을 멈춘 뒤 쓰윽 뒤를 한번 돌아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마당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레온 주민 아저씨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정말 감사합니다.)"
"데 나다.(별말씀을) 부엔까미노."
아저씨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쪽지를 되돌려주고는 그렇게 사라지셨다. 크레덴시알에 도장 찍고 침대를 배정받으려는 순간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