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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시나비 Feb 18. 2020

몬트리올의 겨울, 낭만적 ep.6

기다리던 만남이 드디어. (사진출처: 주니어김영사 인스타그램)

나는 대체로 기분이 좋은 편이다. 가라앉는 날도 있지만 대체로 조조조조조조조조조울 정도의 빈도이다. 습관성 조증이거나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지만 개중에 어떤 날은 이유가 분명하게 기분이 좋다.


<꼬마 난민 아자다>가 맺어준 인연


새벽 녁에 잠을 깨 메일을 열어보니 예상 밖의 메일이 와 있었다. 번역을 의뢰하는 메일이었다. <What is a refugee>라는 제목의 그림책이었다. 엘리즈 그라벨Elise Gravel이라는 작가의 약력을 읽어보니 몬트리올에 산다고 한다. 잘하면 만날 수도 있겠다.


몇 년 전에도 몬트리올에 사는 작가의 그림책을 번역했더랬다. 자끄 골드슈타인이라는 인권운동가이자 만화가의 <Azadah>(한국판 제목은 '꼬마 난민 아자다'/ 주니어김영사)였다. 글밥은 거의 없고 그림으로 말하는 책이었다. 꼬마 아자다는 우정을 쌓았던 종군 기자가 떠나야 한다고 하자 '데려가라'고 떼를 피운다. 학교도 불타 없어진 나라를 떠나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고 싶다면서.


결국 아냐는 아자다를 간신히 달래고 배낭 하나를 남겨 둔 채 길을 재촉했다. 홀로 외롭게 남겨진 아자다는 좌절하지 않고, 아냐의 가방에 든 물건들을 이리저리 조립해 열기구를 만들어 하늘로 훨훨 날아올랐다.


황당무계한 결말이지만 난민 아이의 모험과 도전을 다뤄 주어 좋았다.  난민 아이라고 해서, 친하게 지내던 어른이 멀리 떠났다고 해서 모든 꿈조차 꾸지 못한다면 너무 우울하지 않은가.


몬트리올에 온 것도 따지고 보면 <꼬마 난민 아자다>가 다리를 놓아준 셈이었다. 작년 4월 봄이 한창 무르익은 무렵, 자끄 골드슈타인 작가님이 일산의 작은 동네책방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마침 그날 일정이 비어 있기도 하고,  번역한 책의 원작자를 만나는 행운을 잡고 싶기도 해서 슬쩍 참가신청서를 들이밀었다.


동네책방 <알모>는 아기자기 예쁜 데다 양질의 그림책들로 가득했다. 작가님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몇몇 아이들이 상기된 얼굴로 작가님의 책을 든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곧이어 책방을 들어선 작가님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할아버지였다. 꽤나 귀여운 얼굴과 차림새 덕분인지 그림체와 꼭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적으라고 하시더니, 한 명 한 명 다른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한글로 적어 넣어 주셨다. 정성이 담뿍 담긴 사인을 해 주시느라 도무지 줄이 짧아질 기색이 없었지만, 기다리는 아이들이 얼굴은 기대감으로 발그레했다.


드디어 내 차례. 어떻게 아셨는지 출판사 관계자가 '번역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넣자 작가님은 활짝 웃으며 반겨주셨다. 이름을 물어보셔서 '나비Nabi'라고 써 달랬더니 이렇게 적어주셨다.


"나비에게,

덕분에 이 책이 제대로 날개를 달았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공 아자다가 망토를 두른 귀여운 모습도 사인 아래에 가뿐하게 그려주셨다. 내가 이제까지 받아본 사인 중에 가장 멋지고 제일 정성이 담겼으며 지극히 예술적이었다. 사인받은 책을 소중하게 안은 채, 작가님이 사인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긋이 바라보면 미소를 짓는 아내 분에게 다가가 불어로 몇 마디 간단하게 주고받았다.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

"대학에서 가르치다 얼마 전에 은퇴해 따라왔지요."

"제가 실은 맥길대학교에 박사 지원했다가 떨어졌어요."

"어, 그래요? 그럼 몬트리올대학교로 와요."


마지막 한 문장이 날아와 콕하고 마음에 꽂혔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왜 그리 깊숙이 들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선회해 무작정 몬트리올로 와 버렸다.


작가님의 초대를 받다.  


몬트리올에 도착해 두 주 가량 뜸을 들이다 자끄 골드슈타인 작가님에 연락을 넣었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냥 카페에서 만나주셔도 충분히 감사한데 집으로 불러주시다니 감지덕지였다.


음식 알레르기는 없는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지 세세히 물으시기도 했다. 아내 지네뜨(Ginette)는 물론이거니와 아들과 딸도 같이 저녁을 먹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몬트리올 비행기표를 끊게 만든 장본인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지 뭔가. 피식 웃음이 났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이다. 와인을 사가야 하나, 케이크를 골라봐야 하나, 아님 꽃을 한 다발 장만해 가야 하나... 두근두근한 하루하루가 천천히 흘러간다.  

                       

            귀여움 돋는 자끄 골드슈타인 작가님

          (사진 출처: @olivia_seungji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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