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있다. PMS(생리 전 증후군)이라는 게 발병했다. 사실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전부터, 생리 일주일 전 즈음이면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주변 작가들에게 많이 했다. 달맞이꽃 종자유라는 걸 먹으면 좀 괜찮아졌던 것 같은데. 최근 들어 좀 많이 심해졌다. 귀찮아서 영양제를 잘 안 챙겨 먹은 탓일까. 아니면 일이 많아져서 그런 걸까.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아서 그런 걸까. 뭐가 문제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내가 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 줄 알고 살아왔다. 대신 주변에서 멘털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내 '정신적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루 종일 자는 편이다. 다 때려치우고 잠부터 자거나, 중요한 걸 제외하면 과감하게 포기한다. 나는 늘 80%만 하는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보는 100%와 나의 80%가 다를 뿐이다. 대신 스스로에 대해 허들이 많이 높은 편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100%라고 말 해도, 나는 내가 100%를 다해서 살아 본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럴 마음은 없다. 내가 만족할 만한 100%를 사는 대신, 내 삶과 정신은 피폐해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름 잘 조절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호르몬이 모든 걸 망쳤다. 나는 잘 울지 않는다. 눈물이 많긴 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걸 싫어한다. 그런데 두 달 동안 비슷한 시기에 눈물이 터졌다.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우연인가? 그런데 핑계 같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갑자기 그 주에 안 좋은 일이 많이 터지는 것 같다고 두배로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에 가서 PMS라고 말하고 우울증 약을 받아 왔다. 내가 이걸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작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날이 오게 될 거라는 각오는 했다.
다만 먹지는 않았다. 나의 경우에는 증상이 너무나 명확하고(생리 전 증후군), 다행히 일반의약품 중에서 조금 비싸긴 해도 생리 전 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었다. 웬만하면 이걸 먹어보고 개선이 안 되면 그때는 쟁여놨던 약을 먹을 생각이다.
스쳐 지나가듯 본 유튜브 (전문가의 방송 영상이었던 것 같다.)에서 우울하거나 힘들 때는 진통제를 먹으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우울증 증세가 일시적으로 가라앉는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했는데 (자세한 건 모른다.) 어쨌든 그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냥 흘려 들었다. 약을 타기 전에 너무 힘들어서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두통약(덱시프로 펜) 두 개를 먹었다. 진짜인지는 몰라도 가슴을 계속 짓누르던 응어리가 조금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약을 두 개를 먹고 원고를 했다. 오늘은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정말 너무 힘들었다. 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끝내고 집으로 병원에 들렀다가 두 시간 정도 멍하니 누워 있다가 출근을 했다. 한시나 두시까지는 힘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약 빨 인지 아니면 기분이 좀 나아져서 그런진 몰라도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증세가 좀 심했던 점심때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다른 의미로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글을 써야 하나? 마감을 지켜야 하나? 그냥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디든 좋으니까 취업을 해 볼까. 그런데 취업이 안 되는 것과 별개로 직장 생활을 해도 이 스트레스를 안 받을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작가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알고, 주변 작가님들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 독자 스트레스라고 해도 너무 힘들면 안 보면 그만이다. 회사를 다녔다면 아마 무리였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냥 글이나 써야겠다고 한번 더 생각했다.
마감은 너무 힘들지만, 그만큼 작가가 주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했다. 사무실로 출근을 하면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건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 마감이 있는 원고 말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글로 스트레스를 받고, 또 스트레스를 받을 때 글로 풀고 싶어 한다. 어쩌면 글을 내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게 글을 쓰는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는 천성 작가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