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질문
진단 이후, 2주에 한 번씩 산부인과를 찾았다.
초음파로 아이의 심장을 확인하고,
머리, 팔, 다리의 길이를 측정하고,
작은 움직임을 들여다보며 아이를 살폈다.
이미 진단명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아직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도,
실제로 겪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불안과 슬픔은 여전히, 아니 더 깊어져만 갔다.
초음파 화면의 엉성하게 생긴 형체는
분명 사랑스러웠지만,
그만큼 더 조심스러웠고,
더 절박하게 다가왔다.
나는 주변 사람들로
"만약, 뱃속의 아이가 아프면 어떡하죠?"
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종종
"그래도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좋지"라고 말했지만
나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자 했을까?
질문을 하고 나서 후회가 되었다.
사실 그 말조차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건강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걸까?
정상이 아니면, 기쁨이 될 수 없는 걸까?
그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더 조용해졌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어떤 기준도 아닌,
그저 우리 아이를 ‘우리 아이’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머리는 모르고 있었다.
버스,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지나가면
웃고 있는 아이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걸 바라보는 부모 얼굴만 보였다.
그 아이들이 건강하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였고,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이
괜히 부러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왜 우리 아이는 달라야 할까'
'왜, 하필 우리 아이인가'
아이를 기다리는 기쁨보다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그 사실 하나가
원망이 되어 무겁게 다가왔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이미 너무 많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때로는 울다가, 때로는 생각에 잠기다가
나는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다음날 눈을 뜨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그런 불확실성은
매일 아침 괴로움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이따금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될
수많은 비열한 생각들을 불러왔다.
하루는 친구를 만나면서,
“지우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도 모르게... 그냥 입양소에 보내면 안 되는 걸까?
해외는 편견이 없다던데...
또 부모가 부자면 더 괜찮은 환경 아닐까?”
그러자 친구는
“그럼, 엄마와 아이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선택도 자신이 없었다.
초라하고 죄스럽고
참... 어떤 상상도, 말도, 후회가 되었다.
이기적이고 간사했다.
생각할수록 후회했고,
후회할수록 마음은 더 깊이 처참했다.
보이지 않는 아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더 많은 불안을 키워가고 있었다.
아내는 어느 날,
인터넷으로 진단명을 검색하고선,
극단적인 사례들, 최악의 예후,
상상하기도 무섭고 차가운 의학적 단어들만 가득한 내용들을 보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보면서
매일 좌절했고, 또 절망을 하고 있었다.
슬픔은 어느새 우울로 번졌고,
매일같이 무기력함과 죄책감이 아내를 점점 갉아먹었다.
그러다 문득,
아내와 아이가 걱정되었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인터넷 믿지 말고 검색도 하지 마. 그거 다 거짓말이야.
사람들이 자극적인 걸로 돈 벌려고 하는 거야.
여보에게도 안 좋고 아이에게도 안 좋아.
다시는 이런 거 보지 말자.”
“응... 나도 그러고 싶어.”
우리는 그렇게 또 서로가 한없이 통곡을 하였고
일도, 식사도, 산책도,
일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잠들기 전,
침대 위에는 늘 두 개의 울음이 있었다.
하루하루가 막막했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겐 고통처럼 느껴졌다.
나는 출근을 했지만,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아내가
온종일 걱정되었다.
하루 종일 얼마나 자신을 탓하고 있을까.
사실 회사에서도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나와 아이의 주제가 나올 때마다 나는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점심을 거르고, 창밖만 보였고,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슬픈 노래가 들리면
그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또 이런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서,
나는 점심마다 회사 근처의 큰 성당에 들렀다.
고요한 공간.
그 안에서만 마음이 잠시 편안해졌다.
성당 맨 앞자리에 앉아
무릎을 꿇고,
소리 내어 기도문을 읽기도 하였고..
“마리아여, 여호와여,
왜 저인가요.
왜 우리인가요.
자비를 베푸신다면서,
왜 저희에겐 그 자비가 없나요...”
성당 문 밖을 수없이 뱅뱅 돌았고
그렇게라도 마음을 붙잡고 싶었다.
아내는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들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메시지를 보내왔다.
“남편, 이 노래 지금 듣고 있는데…
가사가 내 마음이랑 똑같아.”
그리고 가사를 덧붙였다.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만을 사랑해...
아내는 매일, 그렇게 혼자서
마음을 버티고 있었나 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내 곁에 같이 있어주기로 했다.
“여보야, 이제 우리... 그만 울어보자.
분명 아이도 듣고 있을 거야.
매일 엄마 아빠가 우는 걸 보면 정말 실망할 거야.”
나는 더 이상 아내 앞에서 울지 않기로 했다.
아내도 울지 않으려 애썼다.
슬픔이 아닌, 사랑으로 아이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늦었다고 생각했던 태교를 시작했다.
여전히 잘 웃지 못했지만,
아이 물품을 하나씩 준비하면서
조심스럽게 웃기도 했다.
밤에는 책을 읽어주고,
태교 음악을 듣기도 하고
티비에서 본 것처럼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태명을 불러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말을 건네면,
그 작은 세상 어딘가에서
정말 아이가 꿈틀거리며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어떤 날은 우리가 하루를 버티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나는 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정말 사랑할 자신이 있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슬픔도, 두려움도, 후회도 아닌
고마움이었다.
슬픔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 사랑도 자라고 있었다.
처음 만날 아이를 위한
조금씩 부모의 얼굴을 닮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처음으로
‘우리가 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 부모였고
이미 사랑을 시작했으며
이미 너의 편이었다.
그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도
우리가 너를 가장 사랑한 첫 번째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함께 맞이할 세상이
비록 낯설고 버거울지라도,
우리는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는 것.
우리가 만나게 될
‘처음의 아이’를 위해 웃으려 애썼다.
그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처음이자, 가장 깊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조금씩,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