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때는 모르는 거잖아요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그리운 건 그리운 대로

by 꿈꾸는 나비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 체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 통 하지 않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은 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며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상실 수업』



얼마 전까지 함께였던 사람은 정말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죽이 잘 맞았고 대화도 술술 풀렸다. 유머 코드도 딱 맞아서 이상하게 안 하던 행동도, 그 사람 앞에서는 자주 하게 되었다. 감정 표현이 서툰 나인데, 그 사람과 있을 땐 나도 모르게 장난을 걸거나 평소 하지 않던 말을 툭툭 내뱉게 됐다. 나도 놀라울 만큼 가볍고 유연해졌다.


그 사람은 엉뚱했다. 조용한 성격이면서 화려한 옷을 좋아했고, 나도 덩달아 특이한 패션에 꽂히기도 했다. 가끔은 짱구처럼 생각지 못한 생각들을 불쑥 꺼내곤 했다. 평범함이나 보통이라는 기준에서 살짝 벗어난 선택을 종종 했는데, 그게 또 썩 괜찮았다. 정리된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런 엉뚱함이 좋았다. 내 안에 없는 결이 그 사람 안에 있었고, 그 덕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길을 함께 걸어볼 수 있었다. 그게 꽤 즐거웠다.


우리는 여행도 자주 다녔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늘 여기저기 둘러보며, "노지 캠핑지로 어때 보여?"하고 의논했다. 숙소보다 자연을 먼저 살피는 우리. 우린 그걸 '캠크닉'이라 불렀다. 정식 캠핑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간단히 도시락 싸 들고나가 요리하고 먹고 누워 쉬는 야외 데이트. 그런 게 우리 방식이었다. 사서 고생하는 거라며 웃었고, 우리가 진짜 잘 맞는다며 자주 감탄했다.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우리에겐 놀이였고, 그건 분명 특별한 방식의 사랑이었다.


TV를 함께 보다가 둘 다 동시에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찌찌뽕!" 하며 손가락을 맞대던 순간, 그게 매일이었다.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가끔 생각난다. 그렇게 우린 닮아 있었는데. 그땐 너무 당연해서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희미한 기억 속 한 켠에 새겨져 있는 조각이 되었다.


영원하자는 약속이 무색하게 현실은 달랐다.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그 엉뚱함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만나면서 크게 부딪혔다. 자주 말이 엇갈렸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달랐다. 언제부턴가 대화가 조심스러워졌다. 마침내는 어떤 말도 하기 어려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헤어지게 됐다. 그래도 한동안은 마음속에서 이런 말을 되뇌곤 했다. '지금은 안 맞지만, 모든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된 뒤에 다시 만나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희망이었다. 그 사람 자체가 미웠던 건 아니어서 헤어진 뒤에도 미련을 떨어낼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 놓인 현실이 문제라 여겼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마음도 결국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미련을 붙잡고 있던 그때의 나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니 그 마음도 멀어졌다.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사진첩 속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고, 같이 듣던 노래가 더는 아프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줄 알았던 이름이, 어느 날 문득 떠오르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은 완전히 가라앉아야만 다시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좋은 기억은 좋았던 대로 남겨두고 싶다. 티끌만치의 감정이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있었던 나의 모습이 더 그리운 걸지도 모른다.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그리운 건 그리운 대로 흘러가게 둬야지.



강물을 거슬러 오를 만큼의 확신이 없다면 흘러가는 쪽에 마음을 두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그 기억을 억지로 다 흘려 보내고 싶지도 않다. 어떤 계절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놓아두고 싶다. 그리움 하나쯤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조금은 무모했고, 서툴렀지만, 그때의 내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니까.


그때로 똑같이 돌아간대도 지금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진 못할 것이다.

수년이 지난 오늘 그 일을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을 줄을 그때는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는 모르는 거잖아요.


아무리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감정도,

아무리 영원할 것 같은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간다는 것을.












나비의 끄적임에 잠시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Pinterest


[꿈꾸는 나비 연재]


[월] 07:00

답은 없지만, 길은 있으니까. (산책하며 사유하기)

[화] 07:00

엄마의 유산, 그 계승의 기록(공저작업 뒷이야기)

[수] 07:00

엄마의 마음편지(딸에게 쓰는 편지)

[목] 07:00

사색의 한 줄, 삶의 단상 (필사로 이어지는 글쓰기)

[금] 07:00

나를 사랑해, 그래서 공부해 (나[내면] 탐구)

[토] 07:00

뜬금없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 (일상 에세이)


[magazine 랜덤발행]

모퉁이에 핀 들꽃처럼 (모퉁이 사람 사는 이야기)

2025 월간 나비 (브런치 성장 기록)

keyword
이전 29화때는 오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