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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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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Oct 15. 2023

2023년의 텃밭일기 : 1015

  고추와 가지는 이제 비실거린다.  꽃은 계속 달리지만, 아무래도 철지난 녀석들의 결실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더위와 병충해에 시달려서 비실함은 더욱 도드라진다.  가지는 조금만 두면 껍질이 슬고, 고추는 매울까봐 손이 쉽게 가지 않는다.  출근하는 아침마다, 잠시 텃밭을 바라보며 고추와 가지가 매달린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텃밭을 즐기는 거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가지 껍질이 슬고 고추가 매워지는 현상은, 살아남으려는 녀석들의 안간힘이다.  줄기마다 빼곡했던 노린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빼앗기는 수액을 보충하려 열심히 물을 빨아들이고 감염을 버텨내려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 싸움의 결과는 매운 고추와 슬어버린 가지였다.  그리고 실한 결실을 만들기보다는 작고 볼품없는 것들을 양껏 맺어냈다.  악조건 하에서 최대한 종의 번식률을 높이려는 본능적 몸부림이다.  먹을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따위엔 상관없이, 맞닥뜨린 환경에서 녀석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몸부림치고 이겨내려 했다.  그러다가 힘이 소진한 녀석들은 누렇게 말라죽어갔고, 기어이 살아남은 녀석들은 더위가 꺾인 이 가을에도 어떻게든 번식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인간의 노력은 사실 거의 없었다.  적어도 올해의 내 텃밭에서는 말이다.  방치농법이라는 좋은 핑계를 두고 텃밭을 관리하지만, 사실 올해는 더욱 게을렀음이 사실이다.  멀칭을 했다는 이유로 검질을 매지 않았지만, 그래서 검질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멀칭 주위의 덤불같은 검질을 예초기로 수시로 잘라주어야만 했다.  게으름은 다른 노동을 낳은 셈이다.  그러면서 얻은 교훈은, 차라리 뿌리까지 검질을 뽑아주는 것이, 그렇게 한 두번 몰아서 고생하는 것이 덜 수고스럽고 신경도 덜 쓰인다는 사실이다.  마당도 마찬가지였다.  뽑기보다는 예초기로 비죽이는 것들을 잘라주며 관리했다.  하지만 검질이라는 것들의 생존본능은 얼마나 강렬한가.  며칠이 지나면 비죽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고, 나는 초록파편을 맞아가며 수시로 예초기를 돌려야 했다.  예초기 날을 피해 바닥에 기듯 퍼지는 녀석들은 또다른 난제였다.  어쨌든 다행인 것은, 가을이 깊어지고, 텃밭이나 마당에서 검질들의 비죽임이 덜해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불리하기만 하던 풀들과의 싸움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나는 이제 좀 덜 신경쓰고 덜 수고로울 수 있는 때를 만난 것이다.  

  무 싹들을 솎아주었다.  무는 제철을 만난 듯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중이다.  루꼴라는 이파리가 커지면서 하나하나 어서 걷어 먹어야 제 때의 맛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쪽파도 가는 줄기들이 빼곡하게 솟아 오르고 있다.  가을 텃발은 초기에 조금만 신경을 써 주면 알아서 잘 자라기에 몸이 편하다.  하지만, 배추는 올해도 여전히 벌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가는 중이다.  김장보다는 쌈배추로 심었다.  먹거리 활용이나 관리가 좀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기대와는 다르게, 벌레먹어가며 쪼그라들어 아쉬운 모습으로 겨우 버티는 중이다.  방제를 충분히 해 주었는데도 그렇다.  무의 둥치가 굵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농어 시즌이 시작되었고, 나는 가끔이라도 바다에 나가 농어를 잡아 굵어진 무를 넣고 매운탕을 끓일 것이다.  시즌마다 다짐하는 숙제 같은 행사다.  


  고구마를 캤다.  멀칭으로 수분이 많은 자리의 고구마 밑둥이 썩어버렸다.  몇 주가 그렇게 죽어버리고, 아쉬움 속에 다른 고구마들을 캤다.  나름 잘 맺혀 있었다.  예전에는 좀 더 늦게 캤는데, 10월 중순인 이 시기에 고구마를 캐니 시기가 적당했는지 굼벵이가 파먹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양은 예년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한 시즌 우리 가족이 즐기는 데엔 넉넉했다.  캐면서 자잘한 고구마 두어 개를 마당의 라이에게 던져주었더니 냄새만 맡고는 관심을 끊어버린다.  사냥본능이 강한 육식취향의 녀석에게 고구마는 먹을 것이 정말 없고 배가 고플 때나 입질 좀 해 보는, 맛없는 간식 정도나 되는 것 같다.  

  한낮은 아직 좀 덥다.  그래도 좀 즐길 만 한가 싶어 타프를 치고 테라스로 나가 고기와 맥주를 즐기는데, 바람이 꽤 불었다.  너무 더워서 밖에서의 활동을 엄두도 못 내던 때가 있었는데, 밖에 나갈 만 하니 이제는 바람이 문제다.  어쩌겠는가.. 순응할 수 밖에..  자연의 흐름 앞에서 인간의 꼼수는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텃밭에서 이미 넉넉하게 배우지 않았는가..  불어오는 바람이 버겁고 쌀쌀한 저녁의 공기가 힘들면 다시 실내로 들어오는 수 밖에 없다.  그것들을 즐길만 하면 그대로 밖에 앉아 즐기면 될 일이다.  사람들이 그러든 말든, 선선한 가을을 가장 잘 즐기는 녀석은 라이였다.  무더위의 버거움을 이겨내고 온 몸에 붙었던 진드기를 방제하고 나니, 녀석의 표정은 매우 편안해졌다.  산책을 나가자고 조르는 때 말고는 마당에서 아주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의 선선한 공기 속에서, 출근하러 나오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는 일어나 한껏 기지개를 펴는 녀석의 모습이 요즘 아주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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