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집안일은 백수가 하기로 했습니다
06. 살림은 집안의 배치부터
우리 집 살림을 도맡아 하기로 결심한 이후, 집안의 모든 것은 내 위주로 재배치되었다. 이 감각을 처음 느껴본 것은 대학에 올라가 자취를 했을 때다. 나의 공간이 생겼지만, 익숙한 집을 떠올리며 꾸밀 수밖에 없었던 나는 처음 장을 보러 갈 때도 무얼 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엄마와 같이 마트를 갔을 때의 기준으로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먹지도 않을 대용량 양파, 파, 마늘, 소금, 설탕, 간장. 간장은 종류도 왜 이렇게 많은지. 진간장, 국간장, 양조간장…
하지만 한두 번 쓰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나의 취향과 습관을 알게 되고 카트 속 담기는 물건들도 달라지게 되었다. 비싸더라도 무조건 적은 양의 야채와 과일. 하루에 한 끼 이상은 꼭 밖에서 먹고 오니, 집에서 먹는 음식은 간단한 요구르트나 볶음밥, 주먹밥으로.
엄마와 살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에 짜증이 많이 났다. 엄마 위주로 되어있는 주방기구들과 용품들, 엄마가 사둔 음식 재료들로 위치를 몰라 헤매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재료들이 없어 중간중간 사 와야 하는 수고로움이 들었다.
내가 처음 가졌던 방은 내 남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었다. 2층 침대와 책상 하나, 옷장과 책장으로 가득 찬 방 안에서 동생은 1층 침대에 나는 2층 침대에 잤던 기억이 난다. 동생이랑은 생활 패턴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 방에서는 잔 기억뿐이다. 그다음 내가 가진 방은 고등학교 기숙사였다. 2층 침대가 양쪽에 위치한 4명이서 같이 사는 집이었다. 2층 침대 2개, 2명이서 나눠 쓸 수 있도록 큰 책상이 2개, 옷장이 4개였다. 씻고 나갈 준비를 할 때면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침대 사이 통로를 두 명이서 지나가느라 부딪혔던 기억이 난다. 다음은 대학교 기숙사였다. 서랍이 달려있는 침대 2개, 옷장 2개, 방 안에 화장실! 우리 학교는 이상하게 생년월일 순으로 룸메이트를 정해줬다. 하루 차이로 태어난 룸메이트와 내 생일날 받은 케이크를 급하게 들고 와 바닥에 앉아 11시 59분에 내 생일 초를 불고, 곧이어 12시에 같은 케이크로 초만 새로 꽂아 룸메이트 초를 불었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 기숙사 방은 옮겨 다녔지만 각자 신청해도 꼭 붙어있는 생년월일 덕에 같은 룸메이트와 3년을 지냈다.
이렇게 나는 인생에서 3개의 방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방은 혼자 사는 방이었다. 그래서 내가 뭘 살지, 뭘 놓을지 온전히 결정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결정해 주는, 누군가에 맞춰야 하는 선택지가 주어졌던 한국을 떠나 내가 선택지를 만들 수 있는 서울로 온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취향에 대해서 고민해 봤다. 내가 도착한 서울의 내 방은 침대, 책상, 식탁뿐이었기에 이불, 베개 같은 침구 세트와 그릇, 세면도구를 사야 했다. 아무도 내게 이게 더 예쁘다, 때가 덜 탄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엄마가 해주는 조언이었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마트에서 방 안에 둘 것들을 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방은 중구난방 그 자체였다. 급하게 산 침대매트는 침대 사이즈에 맞지 않아 애매하게 걸쳐있었고, 조리도구는 뭐가 필요한지 모른 채 사서 절대 쓰지 않는 집게와 화기에 살짝 녹아버린 플라스틱 국자가 있었다. 화장실에는 유명하다는 초록색 알갱이가 보이는 샴푸에, 본집에서 가지고 온 여행세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취향이란 게 없는 공간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갖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마트에 가서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고 골랐지만 일관된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 내 방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랑 비슷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이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다가 지쳐 서울로 왔다. 하지만 서울에 온다고 해서 내 취향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와서도 ‘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고, 그래도 본집과 다른 점이라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나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빌딩 자체도 참 신기했는데, 난 내 공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누군가는 우리 집을 닭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살림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자취 생활에서 살림은 당연한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살면서 가장 놀랐던 건, 빨래는 그냥 세탁기에만 돌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세탁기에 돌려선 안 되는 옷 종류도 많았고, 아무 생각 없이 몽땅 돌렸다가 옷을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세탁기에서는 깨끗해지지 않는 얼룩도 많았다. 특히, 빨간 국물류가 흰 티에 튀어버리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취하면서 처음 깨달았다.
세탁기 말고,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내 손길이 필요했다. 화장실에 물 떼는 끼지 않는지, 수건은 왜 그렇게 빨리 쓰는 건지. 수건을 빨고 널고 개키자마자 다시 빨아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놈의 머리카락은 내가 다니는 곳곳에 빠져서, 빠진 양을 보면 아직 내 머리 위에 이만큼의 양이 남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불릴만했다.
집안에서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엄마의 잔소리가 이해되었다. 머리를 묶고 다녀라, 수건은 썼으면 제대로 걸어둬라. 흰 옷은 조심해서 입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밖에 나와 살면서 엄마한테 전화하는 횟수도 많이 늘었다.
“엄마, 화장실 청소는 락스로 해도 돼?”
“세탁기에 돌렸는데 안 지워지면 어떡해야 해?”
“베개를 돌렸는데, 문을 열었더니 솜이 쏟아져 나와…”
엄마랑 살 때는 전혀 없었던 문제들이 자꾸 생겨났기 때문에, 아니다. 엄마랑 살 때는 전혀 눈치 못 챈 문제들이 자꾸 생겨났기 때문에 엄마에게 도움을 구해야 했다.
본가에 돌아와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를 하고, 점심을 챙겨 먹고, 빨래를 돌리고, 좋아하는 드라마와 책을 보고 나면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저녁에는 엄마가 돌아오고, 엄마랑 저녁을 먹고 나면 산책을 나갔다 씻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잔다.
나는 위화감을 느낄 때마다 시간이 나를 중심으로 주변보다 느리게 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내가 예상하던 것과 다르게 흘러갈 때, 갑자기 불안할 때가 그때다. 내 진심이 담기지 않았을 때이다. 나는 평생 위화감을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았다. 근데, 요즘 본가에 혼자 있으면 이상하게 그 감각이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은 루틴을 매일 지키는 것, 즉 이 집안일에는 나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