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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제나 Oct 04. 2023

05. 나의 존재가치

우리 집 집안일은 백수가 하기로 했습니다

05. 나의 존재가치


오늘은 새롬이의 결혼식날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축하받아야 마땅한 결혼식에서는 곤란한 일이 정말 많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 새롬이 부모님, 친척들까지 결혼식장은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중 하나가 가까이 와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뭐 하고 지냈어하는 말에 나는 바닥에 묻어있던 끈적임처럼 오묘하게 질문들을 보이지 않는 척 지나가려 노력한다. 그러다 착, 피하지 못하고 발에 밟아 버린 끈적임처럼 피할 수 없이 발과 바닥을 닦아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끈적임을 느끼면서도 “사람이 많네. 피곤하다” 같은 혼잣말을 뱉어버린다. 방어기제다. 더 이상의 상황을 만들지 말아 주세요 같은. 나를 내버려 두세요. 꽃말도 아닌 것이. 뱉고 나면 어색한 표정으로 모두들 한걸음 물러선다.


살다 보면 존재가치를 의심받는 상황이 많고, 내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 나는 사회에서 내게 부여된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 사회에서 말하는 존재가치를 가진 사람은 대체 누굴까. 인터넷에 사람들이 써놓은 글이 사회의 기준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가끔 내 주변을 스며들어 나조차도 그런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게끔 물들인다.


취업준비생 : 능력은 없는데 눈만 높아서 고생하기 싫어서 노는 애들

퇴사자 : 회사에서 끈기 없어서 퇴사해놓고 일하기 싫어서 국가에서 주는 실업급여로 명품백 사는 애들

미혼 : 결혼에 대한 환상이 높아 자기 위치를 모르고 허상만 좇는 애들. 애도 안 낳아서 국가에 도움도 안 되는 애들

무자녀 회사원 : 아이 없이 살면서 놀고먹으려는 애들

유자녀 회사원 : 육아한다고 일 제대로 못해서 팀에 민폐 끼치는 애들


새롬이의 결혼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가 급하게 출발하자, 내 옆자리에 앉은 여성 분의 장바구니가 쏟아졌다. 누군가의 저녁이 될 장거리가 떨어졌고, 나는 아주머니를 도와 장바구니에 손에 집히는 대로 넣고 있었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아주머니의 손에서 이윽고 다시 플라스틱이 떨어졌다. 방울토마토였다. 다행히도 내가 밑에서 낚아채어 많이 흘리진 않았다. 손에 닿는 대로 방울토마토를 주어 담았지만, 손에 닿지 않고 이미 저 끝으로 가버린 방울토마토들이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토마토가 뎅구르르 앞뒤로 구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발 밑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좌석 밑에 잠시 쉬기도 했지만 결국은 좌석 사이 긴 복도를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승객 중 아무도 그 토마토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방울토마토의 모습은 꽤나 안쓰러웠다. 꼭지는 이미 따여있었지만 모양은 동그랗지 못하고 길쭉했다. 그 모습 때문인지 구르는 모습이 수월하기보다는 애쓴 듯보였다. 맞지 않는 장소에 와서, 영문도 모른 채 구르는 모습이.


완벽한 구 형태의 토마토가 있긴 한 걸까. 아니, 애초에 완벽한 존재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있긴 한 걸까. 애초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렇지만 이미 “극혐 놀고먹기만 좋아하는 요즘 애들” “세금 내는 사람 따로 있고 축 내는 새키들 따로 있고”“집에서 노는 취업준비생이 불쌍하냐, 회사에서 일한 돈 세금으로 갖다 내는 내가 불쌍하냐” 같은 글을 읽어버린 나의 눈동자는 검게 물들어버려,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안일을 한다. 내가 세상에서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일을 처리하듯 청소를 한다. 아침에 엄마가 나가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TV를 틀어놓고 앉아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불안해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가 없다. 청소기를 이방 저방 다 돌린다. 집안일만큼 성실하게 돌아가는 조직도 없을 것 같다. 어제 분명 같은 시간에 같은 업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소기에 빨려 들어갈 먼지와 머리카락이 바닥에 놓여있다. 청소기를 다 하고 나면 어디서 묻었는지도 모를 바닥에 있는 검은 자국을 닦아낸다. 바닥에는 가끔 알 수 없는 것들이 묻어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깨끗해 보이지만 막상 밟으면 끈적임이 묻어있기도 하고, 이상한 검댕이가 묻어있기도 한다. 어제 청소할 때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검댕이를 걸레로 마구 닦아낸다. 이런 사소한 것에 힘을 쓰다 보면 생각이 명쾌해지기도 한다. 세상과 사회에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방식만이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법은 아니다. 그냥 살아있는 것, 그리고 내가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존재가치를 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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