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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제나 Oct 13. 2023

07. 집안일에는 진심이 있다

07. 집안일에는 진심이 있다


자기소개서를 다시 쓰기로 했다. 매번 같은 자기소개서를 복사 붙여넣기한 뒤, 각 회사 문항에 따라 조금 변형하여 냈었다. 근데 최근 서류 전형에서 자주 떨어지는 것 같아 새로 써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기소개서 문항에서 묻는 건 비슷한데, 나는 그대로라 획기적인 내 인생의 경험들을 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자기소개서를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끔 친구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내가 크게 달라지기 위해서는 ‘감옥 정도는 다녀와야’ 면접에서도 주목받을 만큼일 거라고 말이다. (당연히 농담이다…)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요즘 유튜버들이 자주 한다는 라이프 라인을 그려보기로 했다. 1994년 내가 태어난 년도부터 시작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짧게 그 연도별로 일어난 큰 사건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따지면 지금 나는 내가 10살 때 세운 계획에 실패한 것이다. 10살에 대강 그린 나의 라이프라인은 이러했다.


17살 외국어고등학교 진학

20살 해외 대학 진학

26살 외무고시 합격, 외교관 생활 시작 후 해외 파견 근무

50살 외교관 퇴직 후, 한글학교 운영


우선 첫 번째 외국어고등학교 진학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당시 가고 싶었던 외국어 고등학교가 명확하게 있었으나, 내가 진학할 당시 지역제한이라는 정책이 생겨 내가 살던 지역 외국어 고등학교를 가야 하자 그냥 안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때부터 쓸데없는 강단이 있었다. 그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구나 깨달았다. 


”나는 항상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어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30살까지 내가 한국에서 살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주 상상의 나래에 펼치던 나는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짧은 이야기를 자주 썼다. 그런데 그걸 모아놓고 보니 모든 주인공들이 도망을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거다. 나는 그때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위화감이 극대화될 때도 그렇다. 이 자리에 있는 내가 사라져, 다시 시작하고 싶어 진다. 며칠 전 본 다대다 면접에서 친구들에게 불리는 나만의 별명이 뭐냐고 물어봤다. 근데 이전 면접관이 자기는 유머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며 강조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참이었다. 첫 번째 지원자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마라수연이라고 불립니다. 요즘 마라탕에 빠져서 하루에 한 번은 꼭 마라탕을 먹으러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의 성격은 일할 때도 적용됩니다. 저는 일에도 과몰입하여 더 잘…”

“저는 과몰입러라고 불립니다…”


갑자기 면접장에는 누가 누가 더 과몰입을 잘하나의 대결로 가버렸다. 다대다 면접은 정말 싫다. 다른 사람의 답변을 들으면, 내 답변이 초라해 보이고 내가 준비한 답 말고 다른 답을 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옆 지원자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는데


“저는…”


머리가 새하얗게 되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앞에 앉은 면접관 중 가장 높은 직급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장님이 나의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혜영 씨도 뭐, 친구들한테 과몰입을 잘한다고 불린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하고 웃어버렸지만 난 과몰입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면접에 앉아있는 나는 내가 아는 나도 아니며, 친구가 아는 나도 아니다. 예상한 질문에 준비한 답을 할 때는 진짜도 아닌 그럴싸한 이야기를 뱉는 기계 같은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직한 마음을 드러낼 때는 그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 솔직함이 무례함과 똑같다는 생각에 힘들다. 나를 보는 눈빛, 면접관의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하나하나 맞추는 나, 모든 상황에 내 진심은 1퍼센트도 없다.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나 내 주변 사람들이 나는 투명해서 상황이든 사람이든 지치면 금방 티가 난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나는 그냥 지친 사람이 된다. 


그렇게 면접을 망치고 돌아온 날, 엄마에게 전화했다. 


“면접이 어려워 엄마”


거짓말하는 게 어렵다고, 그 사람들이 내가 느끼는 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인지 시험하고 싶어 진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나이브한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를 평가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어떤 모습을 내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마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평가한다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과몰입하는 사람보다는, 얕고, 넓게 파는 사람이다. 어떤 것을 마음 가득 좋아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무언가를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못하는 걸까. 면접이 끝나고 자책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고민해 봤다. 누군가가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에 질투가 났던 것 같다. 어떤 걸 좋아하는 진심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꼭 어떤 걸 좋아할 때 내 마음의 순도를 검열할 필요가 있을까.


엄마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하면 된다고 했다. 엄마의 이야기에 더 말이 없어졌다. 왜냐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이 들면, 그 반대로 말하고 싶어 지곤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엄마의 이야기에도 그렇다. 한국인이 ‘아니’라는 상대방의 문장을 냅다 부정하며 말을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래서 엄마 내가 면접을 못 보겠다는 게 아니라…!”


집안일은 그런 의미에서 정반대의 행위다. 집안일은 티가 나지 않는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뜻의 의미가 아니라 (물론 그것도 맞다) 더러운 건 티가 나지만 그걸 깨끗하게 만드는 일은 티가 덜 난다. 물리의 법칙으로 설명하자면, 원래 이 위치에 놓여있던 컵이 이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 것은 관성. 그리고 그 컵을 쓰고 마음대로 책상 위에 둔 나의 행동이 작용. 그러니 나는 컵이 원래 놓여있던 대로 놓는 관성에 따른 행동을 한 것이므로.


엄마가 들으면 소름 끼칠 이과적 문장이 탄생했지만, 항상 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집안일이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작용하기도 전에 반작용을 생각하는 애였으니, 관성을 거스르는 게 익숙한 나에게 관성을 따르는 일이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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