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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제나 Oct 17. 2023

09.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09.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술의 맛을 처음 맛보았던 순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과자를 마음껏 사서 먹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거짓말의 맛이 그런 순간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에겐 웃길게 분명하지만 난 거짓말을 싫어한다. 


어렸을 적에는 모두 ‘거짓말은 나빠요’ ‘솔직하게 말하면 모든 용서받을 수 있어요’리며 거짓을 악으로 정의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걸 왜 솔직하게 말했어’ ‘사회생활에는 어느 정도 거짓말이 필요해’ ‘너만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 하며 오히려 거짓을 종용하곤 했다. 그 거짓의 맛이 내겐 어른의 맛이다.


어릴 때 거짓말에 잼병이던 나는 항상 투명한 얼굴로, 무슨 일이 생기면 집에 돌아와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심란한 표정으로 들어와 엄마의 ‘무슨 일 있어?’에 ‘아니, 아무 일도 없어’하고 거짓말을 하고 문을 닫고 누워있었다. 그러다 30분도 못 참고는 거실로 달려 나와 ‘엄마, 실은…’ 하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고백하곤 했다. 


퇴사를 한 뒤, 나는 사실 엄마에게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기 싫어 자주 하던 연락을 피했고 엄마는 아마 자연스럽게 내게 어떤 힘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엄마에게 오는 전화는 늘어갔다. 엄마는 전화해 이것저것 일상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곤란하지 않을, 집 근처에 맛있는 브런치집이 생겼는데 나와 갔던 곳이 더 맛있다는 이야기나 비가 많이 와서 며칠 전 집 앞에 물난리가 난 이야기 같은 전혀 나와 연관 없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뱉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실은,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엄마의 계속되는 말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엄마도 내 침묵을 느낀 듯이 말을 멈췄다. 우리 둘의 침묵에 정적이 계속 됐다. 한숨을 쉬었다. 숨이 무거웠다. 숨의 끝에 엄마에게 말을 하지 못한 죄책감이 올라타 무거웠다.


‘나 실은 저번주에 퇴사했어’

말을 뱉고 기다렸다. 난 내 침묵을 깼는데, 엄마의 침묵이 계속 됐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끔 이런 순간이 온다. 오히려 내가 엄마를 이해하고, 걱정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나는 엄마의 침묵이 길어지자, 갑자기 전화해 퇴사를 했다는 딸의 이야기에 엄마가 얼마나 곤란하겠나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 걱정이 가시기도 전에 엄마는 입을 열었다.


‘사직서는 얼굴에 던져줬어?’

엄마의 예상치 못한 답에 나는 대뜸 웃어버렸다.

‘요즘 전자결재야 엄마’


엄마에겐 현명한 답하기 같은 사전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엄마가 내 뜬금없는 발언에 당황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침묵을 기다린 끝에 도착한 엄마의 답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퇴사도, 퇴사를 말하는 것도 막상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퇴사를 했을 때 퇴사를 왜 하는지 묻지 않는 것은 어렵다.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 말을 하지 않아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언젠간 말해주기를. 말해주지 않더라도 그런 이유가 있겠지 하며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이 어른 아닐까. 어렸을 땐, 내가 속상한 표정이면 친구가 왜인지 물어 공감해줬으면 했고 친구가 속상한 표정이면 친구가 나한테 속상한 것을 말해줬으면 했다. 누군가가 나의 모든 것을 알아줬으면 하고, 누군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나이는 지났다는 것을 실감한 지금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어른이 된다. 그리고 이 길을 먼저 걸은, 어른이 된 내 모습을 한 엄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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