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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May 17. 2024

나의 두 가지 가구와 하나의 공간

지옥이라도,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


  베란다 창에 빗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는 밤, 낮부터 내리던 빗방울이 아직도 춤을 춘다. 방금 샤워를 마친 몸으로 티셔츠와 수면 바지를 입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눕는다. 머리맡엔 어제 읽다만 책 한 권이 놓여있다. 충분한 감동. 시간이 완전히 멈춘 듯한 나의 거실에는 소박한 행복이 은은하게 넘실거린다.


  저녁 열한 시의 나의 거실에서는 궂은 날씨조차 그 의미가 달라진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소리 같고, 그윽한 독서등이 비추는 거실 풍경은 유명한 영상 작가의 브이로그 같다. 한참 책을 읽다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아 넣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몸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러면 너그러운 마음은 어느새 폭포수 아래로 떨어진 물줄기처럼 거실 가득 퍼져간다. 그 마음이 오늘 하루 고생 했다며. 이제 쉬어가도 된다며 나를 감싼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오늘 하루 가슴에 무겁게 응어리졌던 부정적인 감정이 마치 비눗방울처럼 가벼운 모습으로 거실 천장으로 날아간다.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눈이 감겨온다.




  그러다 문득, 낮이라고 부르는 시간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만다. 비행기의 뒷사람에게 의자를 걷어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뒷목에 힘이 들어간다. 사무용 의자가 보인다. 소파가 기댈 수 있는 둔각 삼각형이라면, 사무용 의자는 직각 삼각형이다. 칸칸이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굳어있다. 소파가 아닌 것이 쉬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오랜 시간 무표정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다 보면 완전히 잊게 된다.


  기댈 공간의 부재는 쉴 공간의 부재로 이어진다. 그것이 나로하여 열한 시의 거실 분위기를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것일 테다. 노란 독서등. 샤워를 마친 아직 덜 마른 몸의 온기를 그린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아이보리색 소파에 몸을 기대는 순간을 그린다. 샤워를 마친 후의 적절한 습도와 온도. 자주 비워졌다 다시 차는 바닐라향 방향제의 향기를 그린다. 얼굴의 긴장이 풀리고, 어깨에 힘이 기분 좋게 빠진다.




  어떤 무지막지한 일이 일어나도 견뎌낼 수 있을 기분. 그것은 늦은 시간, 거실이 주는 노곤하고 가만한 행복이면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은은한 독서등과 몸을 누일 수 있는 소파 그리고 작은 거실은 나에게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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