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블랑
그녀를 따라 폭이 좁은 골목을 걸었다.
내가 세상에 있기 훨씬 전부터 겹겹의 시간을 보내온 책들이 그 곳에 있었다. 그 오랜동안 조심스레 세공된 금박과, 프레임과, 가죽 책등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간직해 온 이야기들을 마주친 순간, 마침내 만나게 된 경이로운 운명으로 유한한 생의 길이를 잠시 뛰어넘었음을.
나는 골목에서 잠시 거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밀려오는 구름을 이마에 두른 채, 작은 책마다의 생태계와 도시들을 느릿한 발걸음으로 지나는 이상한 거인. 동시에 나는 책에 내려앉은 작디 작은 눈동자였다. 책들이 지닌 이야기는 거대했고, 태어난 지 겨우 몇 십 년인 나는 그 골목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분명했다.
Soyeon Na, Blanc
노마드미술기자/아티스트
일간지 미술기자로 재직 후 퇴사, 세상 어디든지 사무실 삼는 '노마드미술기자' 로, 신문 디자이너이자 호기심 많은 미디어 콘텐츠 관찰자로 산 지 십 년 째.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로서 파리에서의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마치고 서울에 머물며 그림과 글을 만든다. 최근 영감의 원천은 여행과 케이팝,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과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