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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nc 블랑 Jul 22. 2018

세상의 끝을 넘어

'웹진 무구' 7월호 '바다' 기고


바다라는  정말로 어떤 것인지 만큼은 어느  홀로 비행기를 탔을  알게 됐다.”

 -7월 바다 / 세상의 끝을 넘어 글 / 블랑


옛날에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반듯하게 펼쳐진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정한 위도에서만 자라온 어린이의 감각도 실은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어릴 적 만났던 서해 바다는 세상의 끝과 다름이 없다. 작은 몸으로는 까치발을 한다 해도 그 너머를 볼 수 없어, 바다는 푸른 장벽과 다르지 않았다. 손에 꽉 차는 펜스 너머엔 흡사 거대한 국경이 흐르는 것이다.




 내 가슴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 많은 방랑자가 떠돌고 있다. 어린 방랑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 지식이 없었지만, 세상을 모르는 만큼 힘이 넘치고 겁이 없다. 성큼성큼 걸어서 바다 위를 뛰어가고 싶을 때 나는 세계의 명소 화보집을 읽었다. 책장에 얼굴을 파묻을 때면 내 안의 방랑자는 독일 숲 속의 하얀 성채에도 태양빛 쏟아지는 그리스의 언덕에도 갈 수 있었다.


 그 방랑자가 언덕의 진짜 바람을 만끽하려면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은 ‘조국의 지리적 조건’ 이었다. 삼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대개 비행기를 타지 않고서는 외국에 갈 수 없는 나라. 프랑스의 누군가는 아침 조깅을 하다 독일에서 모닝커피를 마신다는데, 어떤 레스토랑은 앞문은 벨기에고 뒷문은 네덜란드래. 그런 얘기를 알게 될수록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로질러야 하는 바다의 존재가 아쉽고 서글펐다.


 운동화를 신고 산책 가듯 가볍게 걸어 파도의 장벽을 넘고 싶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물 위를 걷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바다라는 게 정말로 어떤 것인지 만큼은 어느 날 홀로 비행기를 탔을 때 알게 됐다.


 이륙하는 기체가 고도를 높이며 먼 하늘로 떠오를 때 창문 너머엔 아이 시절 너무나도 커다랬던 서해 바다가 작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바다의 너머엔 내가 살던 도시보다 훨씬 광활한 대륙이 있었다. 커다랬던 장벽은 이내 보이지 않게 됐다.


 그리고 진정 끝없는, 바다 너머의 바다가 나타났다. 완만하게 둥근 수평선을 그리는 하얗고 파란 바다를 내가 지금 건너가고 있다. 지구라는 별의 결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푸른 빛. 나의 작은 비행기가 광활한 바다를 산책하고 있다는 실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면서 바다 위를 걸어가는 어른이 된 나, 벽을 마주하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에 섰던 지난날의 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작은 방랑자가 웃었다. 무한한 바다 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것이 구름이 아니라 어쩐지 발자국 같다. 세상의 끝을 넘어 오른 나의 가볍고 하얀 발자국. 눈을 감고 새로운 대륙에 도착해 발을 딛는 나를 상상한다. 그 때의 무거웠던 펜스를 살짝 손으로 밀어본다. 울타리는, 문이었다.



*이 글은 '웹진 무구' 7월 호 [바다] 에 실렸습니다. 위 링크에서도 글을 읽으실 수 있으며, 8월 호 발매 후 브런치에 전문을 게재했습니다. 프리뷰는 웹진 무구 담당자님의 발췌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번 호도 편집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http://www.mugu.kr/?p=7236


Soyeon Na, Blanc

노마드미술기자/아티스트


일간지 미술기자로 재직 후 퇴사, 세상 어디든지 사무실 삼는 '노마드미술기자' 로, 신문 디자이너이자 호기심 많은 미디어 콘텐츠 관찰자로 산 지 십 년 째.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로서 파리에서의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마치고 서울에 머물며 그림과 글을 만든다. 최근 영감의 원천은 여행과 케이팝,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과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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