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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nc 블랑 Jun 16. 2020

밤 열한 시 동네 카페로의 여행

어떻게든 여행을 하고 싶어서

2020 6 16 화요일  열한  십이분,  나는 집에서  정거장 떨어진 카페에 앉아 있다. 이곳 영업 마감 시간인 열두 시까지 나는  짧은 여행기를 쓰고 돌아갈 것이다.


더운 여름밤에 다 열리지 않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쐬다가 오늘만큼은 완성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볍게 들르려 했던 집 앞 카페는 갑자기 영업시간이 바뀌어 있었다. 충동적으로 카페 앞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오는 시내 방향 버스를 탔다. 그 시간에 그 버스가 온 타이밍이 마음을 부추겼기에.


버스는 네온사인이 빛나는 거리를 여유롭게 달린다. 몇 번 정차하고 다시 출발하다가 익숙한 사거리가 나타났다. 최근엔 조심하느라 거의 도보 거리에 머물기 때문에 내게는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탁 트인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방의 헤드라이트들과 전광판의 광고들. 이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려온다.


버저를 누르고 하차 카드를 찍고 뒷문이 열렸다. 세상이 바뀌기 전 참 자주 발자국을 찍던 중앙정거장이 오늘은 간만에 보는 친구처럼 설렌다. 횡단보도를 건너 점점 가까워지는 카페의 간판이 밝게 빛난다. 늘 다니던 익숙한 시간대에, 늘 익숙하게 열려 있다는 것조차 새삼스러워진 날들이 훅 밀려든다.


카페는 이따금 직원과 친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오거나, 강아지를 데리고 온 남자가 테이크아웃을 한다. 여기는 로스팅하는 곳이어서 커피가 맛있는데, 내 마지막 기억으로는 직접 만들기 시작한 빵도 맛있는 곳이다. 발목에 코를 대고 반가워하는 조그마한 아기 강아지와 인사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크림브륄레를 선택하고 음료를 주문했다. 어느 분이 계시든 모든 직원이 친절하고 밝기 때문에 계산을 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잔디가 깔린 반 야외석이 이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이 글이 끝날 때까지 쓰는 모든 것들에 오래간만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자리로 서빙된 더치 크림 커피는, 이것도 오랜만에 마셔서일까, 정말로 맛있다.


이 잔디 구역의 천장에는 천막과 함께 작은 알전구 조명들이 역 아치형으로 늘어져 있는데 지금 올려다보니 그것이 꼭 캠핑을 온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코로나 이전의 삶 속에 있었던 나는, 이렇게 나에게조차 예고 없이 훌쩍 기분 따라 발걸음 따라 좋아하는 장소를 옮겨 다녔다. 걸어서 다니는 가까운 거리보다는 버스를 타고 한강을 구경하며 건넌 뒤 나타나는 풍경을 좋아했다. 버스 안에서 보는 한강은 물론 여전히 좋아해서, 지금도 나는 수없이 지난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꼭 풍경을 한 장씩 사진으로 남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다리에 진입하기 직전 펼쳐지는 교차로 사이에 숨어 숨 쉬는 작고 푸른 나무들이 이루는 도시의 숲이다. 그 나무들이 내가 앉은 차창 앞 도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거나 반짝이는 햇살과 별들을 머금는 건 정말로 아름답다.


사실은 오늘도 버스를 탄 뒤에 조금 망설였다. 이대로 한강을 보러 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혼자, 다리에서 내려서, 야경을 보기엔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다시 운전 연습하고 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면 가장 먼저 밤의 한강을 보러 가야지.



그동안의 숱한 여행지에서 마셨던 모든 커피가 생에 단 한 번 단 한 잔의 커피였던 것처럼,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이 한 잔도 여행길에 마시는 오직 한 번뿐인 커피다. 시절이 변하며 내 마음에서 여행의 기준이 바뀌었다. 바뀌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여행을 하지 못하면 내가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나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여기에 퇴고도 없는 짧은 여행기를 남긴다. 커피를 거의 다 마셨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여행이 곧 끝난다.


Soyeon Na, Blanc

노마드미술기자/아티스트


일간지 미술기자로 재직 후 퇴사, 세상 어디든지 사무실 삼는 '노마드미술기자' 로, 신문 디자이너이자 호기심 많은 미디어 콘텐츠 관찰자로 산 지 십 년 째.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로서 파리에서의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마치고 서울에 머물며 그림과 글을 만든다. 최근 영감의 원천은 여행과 케이팝,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과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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