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과 맥주와 사케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서로 가벼운 인사로 시작해 부딪히는 잔으로 어제를 마무리했다. 오래된 목재 계단에서 나는 삐그덕 소리가 나름 낭만적이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슬슬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내려와 유린안의 타마고카케고항을 먹고 오카야마로 향했다. 내가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할 때, 이곳 사람들은 일과를 시작한다. 붐비는 아침 전철과 여유롭게 다음 행선지를 검색하는 나의 모습에서 조금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모두가 공부하는 독서실에서 혼자 휴대폰을 만지던 내 모습 같았다.
일본 설화 속 영웅인 모모타로 동상
JR선을 타고 오카야마 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날 반겨주었던 모모타로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푸른 녹이 제 몸을 덮을 동안 모모타로는 오랜 시간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여기에 있을 테고.
미리 예약한 숙소에 짐을 맡기고 일본의 3대 정원인 고라쿠엔과 까마귀 성이라고 불리는 오카야마 성으로 향했다.
다양한 모습의 트램들이 오카야마 시내를 가로지른다.
마침 숙소 앞에 트램 정류장이 있어 손쉽게 탈 수 있었다. 이제 막 달궈지기 시작한 날씨였기에 도보 이동은 피하기로 했다.
트램의 첫인상은 포근함이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에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벽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주중의 한가로움일까. 적어도 내가 있는 이 공간의 사람들에게 조급함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급했던 건 한가로운 여행을 온 나뿐이었다. 아직 오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다음 날 일정을 찾아보며 '혹시' 하는 걱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한산함을 방해하고 있었다. 여태 그래 왔던 것 같다. 인간관계나 나의 일 또는 고민들 역시 지금 당장 일어날 것이 아님에도 끊임없이 곱씹었다. 나중에서야 느껴지던 사소한 행복들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며 내가 나를 옥죄어 왔던 것 같다.
스마트폰은 잠시 내려놓았다. 정류장이 3개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이동시간은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처럼 조용히 창문에 머리 맡을 기대어보기도 하며 여행객처럼 지나가는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누군가 말했었다. 진짜 여행은 기차나 버스 창문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고라쿠엔 정원 후문으로 향했다.
아슬아슬 초록불이 꺼져가는 신호등을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 여기까지 와서 조급하게 뛰어가기는 싫었고 어차피 혼자 온 여행, 내 게으름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겐 시간도 많았으니까.
고라쿠엔 정원으로 향하는 다리를 걸으며 내 앞의 정원 입구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동전 사용이 잦은 일본이라 주머니에도 두둑하게 동전이 들어있었다. 기분 좋은 푸짐함? 참 소소한 행복에 웃음이 나왔다.
고라쿠엔 정원으로 가는 다리에서 바라본 오카야마 성
'짤랑'
생각보다 푸짐했던지라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동전 몇 개를 떨어뜨렸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에 더 떨어진 물건은 없는지 살피면서 고개를 들자, 푸른 녹읍에 우뚝 서 있는 까마귀 성을 마주했다.
두 장소가 가깝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정말 고개만 돌리면 서로의 공간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살짝 고개만 돌렸으면 일찍 봤을 텐데.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경주마처럼 나 또한 보이지 않는 차안대를 쓰고 있었다.
여행 와서도 나는 그저 앞으로 가기에 급급했구나. 헤매지 않기 위해,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여러모로 전전긍긍했었구나.
하루에 몇 번씩이나 쉬고 싶다, 쉬고 싶다 노래를 불렀건만 뭐든지 한 번 해본 사람이 잘하는 것 같다. 다리에서 예상치 못한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됐다.
고라쿠엔 정원과 오카야마 성을 돌아볼 수 있는 티켓을 구매한 다음 정원에 들어섰다. 그리고 3대 정원의 푸르름이 펼쳐졌다.
카운터에서 미리 받아둔 한글 가이드 북을 받고 들어서자 나의 호기심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괜히 3대 정원 중 한 곳이 아니구나. 이곳은 여름에 와야 한다던 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놀라운 마음에 몇 분동안 서서 바라만 보았다.
오기 전 생각했던 동선은 다 잊어버렸다. 그저 내 발걸음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한국만큼 더운 날씨에 그늘을 찾아 걷고 정원을 배경 삼아 벤치에 앉기도 했다. 이리저리 갔던 길을 또 가고 왔던 길을 오기를 반복하며 생각을 내려놨다.
구라시키도 그러했듯, 이곳의 연못에도 수많은 잉어들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지느러미에 잔잔한 물결이 인다. 어쩌면 정원을 두 발로 걷는 우리들도 저 잉어 무리 중 하나가 아닐까.
유난히 오카야마에서 보이는 연인들의 모습엔 남다른 은은함이 묻어났다. 그들의 행복함과 오카야마의 푸근함 사이의 싱크로율이 제법 잘 맞아 보였다.
붐비지 않고 서로 웃으며 걷는 이곳의 낭만은 몹시나 황홀했다. 돌담과 연못이 한 면을 이루고 푸르른 나무와 오래된 목재 건축물이 그 반대편을 이룬다. 그리고 이곳의 모두가 나머지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