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이 회색의 시간.
<gray zone :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부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오늘은 수능이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나는 어땠었지? 진인사대천명(사람은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을 되뇌이면서도, 그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서 어쩔줄 몰라하던 내가 떠올랐다.
나는 수능이 끝난 다음 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던 날이었다. 아직도 발이 떨어지지 않던 그날 아침의 현관, 그리고 담임선생님과의 대화가 생생하다. 평소보다 많이 떨며 시험을 봤던 나머지, 가채점을 하기가 두려워 학교에 가기 싫었던 것이다. 당시 이미 수시 우선선발에 합격한 대학도 있었고, 정시로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시 최저등급만 맞추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한 과목이라도 수시 최저등급을 넘지 못한다면, 그것 때문에 꿈꾸는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걸 확인하는 순간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그것으로 내 운명이 정해진다 생각하니,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나보다.
결국, 그나마 잘 봤다는 확신이 들었던 수학 한 과목만을 다시 풀어 채점했고 (답안을 옮겨적어오지도 않았었다), 수 일이 지나 공식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고서야 그렇게 두려워했던 나머지 점수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 마고는 비행기에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는 그 구간을 못 견뎌한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끼어있는 그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아, 사실 지금의 나도, 마고나 열여덟 살의 나와 다르지 않다. 내가 할 일은 거진 다 해놓고, 잠시 결과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너무 길고 무겁게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지금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단기간에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하고 몰아치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그레이 존을 지나가고 있는 중일지도.)
작년 이맘때쯤 취준생 이지현은, 그레이 존을 두려워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불확실한 구간은 삶의 생산성을 높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그 동안 수능이 끝나고 나서 내가 굉장히 행복했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그 사이에 이런 저런 두려움과,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 위한 이런 저런 노력들로 고군분투해왔었다는 걸 깨달았다.
Embrace uncertainty. Some of the most beautiful chapters in our lives won’t have a title until much later.
_The art of uncertainty 중에서
그래, 뭐 어쩌겠어. 그냥 받아들이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회색의 시간. 갑자기 시간이 주어졌다고 행복해야한다는 생각에 더 불행해하진 않길. 그냥 어떤 페이지던, 그 다음 장이 펼쳐졌을 때 지금의 시간이 다 경험과 추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회색의 구간을 통과해 나아가보길. 쉽지만은 않은 이 회색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수험생, 취준생,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그냥 토닥여주고 싶다.
열한 번째 #목요일의글쓰기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