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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 모든 순간

화려하지 않은 고백

by 눈이부시게
네가 없이 웃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
힘든 시간 날 지켜준 사람
이제는 내가 그댈 지킬 테니

너의 품은 항상 따뜻했어
고단했던 나의 하루에 유일한 휴식처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긴 말 안 해도 눈빛으로 다 아니깐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지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지
나를 보는 네 눈빛은
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모든 순간은 눈부셨다

불안했던 나의 고된 삶에
한줄기 빛처럼 다가와 날 웃게 해 준 너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긴 말 안 해도 눈빛으로 다 아니깐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지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알 수 없는 미래지만
네 품속에 있는 지금 순간순간이
영원했으면 해

갈게 바람이 좋은 날에
햇살 눈부신 어떤 날에 너에게로

처음 내게 왔던 그날처럼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폴킴, 모든 날 모든 순간(Every day, Every Moment)



언젠가부터 폴킴 노래가 좋아졌다.

안녕, 있잖아, 커피 한 잔 할래요, 모든 날 모든 순간, 내가 널 지켜줄게..

(그러고 보니 제목을 나열했을 뿐인데 한 문장이 되네~)


작년 8월, 한창 무덥고 바빴던 여름,

새로운 기관으로 이직한 후

개관식을 준비하던 중요한 시기

걸리면 안 될 코로나에 걸려 버렸다.

쉴 수도 없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아

비어 있는 엄마집에서 셀프 격리를 하던 중

아이들에게서 노래 선물이 도착했다.


한참 내가 좋아하던 '커피 한 잔 할래요'를

딸과 아들이 직접 연주하고 부른,

귀여운 버전 '커피 한 잔 할래요'.

아들의 후렴구는 살짝 타의(라 쓰고 누나의 압박이라 읽는다)가 깃든 듯했지만

혼자 열에 들떠 앓고 있는 중에도

큭큭거리며 웃기에 충분했다.

왜 이렇게 예쁘냐, 우리 애들.


늦게 퇴근한 남편과 자기 전 누워

종종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다양한 얘깃거리를 늘어놓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메인 이슈는 늘 아이들이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와

한참 지난 옛이야기들을 나누다

우리 둘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의 흑역사 얘기에

잠든 가족들 깰세라 숨죽여 킬킬거리기도 한다.


늘 마지막 마무리는 한결같다.

우리 애들 참 이쁘네, 잘 크고 있다.

참 고맙다 우리 애기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아이들 얘기를 매일 나눌 수 있는 게 가슴 깊이 고맙다.





작년 9월 내 생일 즈음,

유통업에 근무하는 남편이 경상남도 김해로 발령이 났다.

승진하며 난 발령이라 모두들 축하의 말을 건넸고,

내 생일파티와 승진파티를 겸해서 가족 파티를 했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같은 경기도권 지사로 오갈 때와는 달리

물리적 거리가 주는 심리적 압박은 꽤나 컸다.

물론, 해외도 아닌 국내지만

언제든 맘먹고 휙 올라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에

전혀 발생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돌발상황에 대한 긴장으로

나도, 남편도 부담이 컸고

발령지에 최소 2년, 길게는 5년도 있는 것이 통상적인 상황이었기에

짧지 않은 이별의 기간에 걱정도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남편에게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요?" 라며 진심으로 부러워했지만

전라도 출신에 서울, 경기에서만 살아봤던 남편이기에

생소한 경상도 지역에서의 생활과

새로운 직급과 직책, 동료와 상사, 처음 맡는 업무로

남편의 마음엔 무거운 납덩이가 얹혔으리라.


발령이 결정된 후 준비할 시간은 고작 2주.

마음이 급했다.

바로 주말에 내려가 급하게 원룸을 구하고

다음 주에는 차에 옷가지며 살림을 싣고 소박한 이사를 했다.

DON'T WORRY

GIMHAEPPY

제법 입에 달라붙는 슬로건이 고속도로 IC에서 우릴 반겨주어

와 잘 지었다, 재밌다_웃었지만

먹먹한 차 안의 공기는 금세 그 웃음을 상쇄시켰다.


얼마 안 되는 살림을 원룸에 채우고 있는데

딸이 아빠에게 쓴 깜짝 편지가 가방에서 나왔다.

편지를 읽은 남편은 한동안 가만히 멈춰 있었다.

이윽고 눈물을 닦아내며 딸에게 전화해 고맙다 울먹이고,

난 그 모습에 "아 뭐야~ 약한 남자!" 하며 놀렸지만

꿀렁꿀렁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삿짐을 얼추 정리하고,

1박 2일 짧은 둘만의 시간을 뒤로한 채

나는 홀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곧 버스가 움직이고 창밖의 남편이 내게 손을 흔든다.


20년 가까이 함께 산 내 눈에는 보였다.

괜찮은 척 보이지만 매우 복잡한 심경이라는 걸.

설레고 기쁘기보다는 걱정과 외로움이 사무치고 있다는 걸.

든든하던 남편이 그날은 너무 작고 약해 보였다.


내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 남편은 더 힘들겠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할 수 있는 한 밝고 재미있는 목소리로 인사하며

마치 버스를 처음 타는 사람처럼 손을 신나게 흔들었고,

버스는 터미널을 벗어났다.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내게 손을 흔들던 남편이 내 눈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참아왔던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가장이라고 저렇게 외지에 혼자 남아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덜렁 떨어져서

안 괜찮은데 괜찮으려 애쓰는구나.


어디에 그렇게 숨겨져 있었던 건지 흘리고 흘려도 멈추지 않던 눈물은

두 시간여를 지나 중간지점인 선산휴게소가 되어서야 겨우 멎었다.


너무 익숙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함께'라는 말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당연하지 않을 것이란 게,

남편이 없는 동안 아빠의 자리까지 내가 채워야 한다는 게,

나와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남편 혼자 먹고 자고 살아간다는 게

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던지.





혼자 있게 된 나는 아빠와 함께할 때보다 더 강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늘 많은 식재료를 알아서 사 오던 '아빠마트'가 운휴(?) 상태가 되자

나는 매일같이 늦게 퇴근한 피곤한 몸으로

인터넷 쇼핑을 하며 간식과 반찬거리를 구매해야 했다.

남편이 사 올 때는 전혀 고려하지 않던 100g당 단가,

성분, 원산지, 원료 함유량.. 왜 이렇게 따져야 할 게 많은 것인가.


아이들 먹일 음식을 소홀히 하면 남편이 더 미안해할까 봐

더 맛있는 메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보려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보며 때아닌 요리 연구에 돌입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너무 맛있다고 엄지척 해 주며 먹어주었고,

남편에게 "아빠 우리 이렇게 맛있는 거 먹는다!" 하며

사진으로나마 아이들을 이렇게 잘 챙기고 있다는 마음을 전했다.

아빠가 담당하던 아들의 월 1회 병원 정기검진 역시 내 차지,

돌봄 휴가와 연차를 번갈아 쓰며 병원 스케줄과 기관 일정을 맞춰 휴가를 내고

회사에서 집으로 와 아이를 태우고,

퇴근했던 길을 다시 달려 회사보다 멀리 있는 병원까지 다녀오곤 했다.


석 달도 전에 계획해 둔 아들과의 여행날,

남편이 데려다 주기로 했던 공항길이기에 차편은 생각도 않고

가장 이른 시간 출발, 가장 늦은 시간 도착 비행기를 끊었는데

막상 남편이 발령 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차, 경기도 우리 집에서 가는 버스는 그 시간에 없다.

심지어 조금 빨리 가보겠다고 하필 김포공항 출발을 선택했는데

김포공항은 주차비도 더 비싼데 주차면마저 많지 않단다.

한참을 검색해 인근 공영주차장에 주차하는 방법을 알아냈지만

그마저도 만차일 수 있다는 글에 조마조마..

돌아오던 날도 늘상 공항 문을 나서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졸린 아들의 손을 붙잡고 캐리어를 끌며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공영주차장으로 와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김포공항이 이렇게 멀었던가.


어느 날은, 아들이 샤워하는 중 갑자기 해바라기 샤워기가 툭 떨어졌다.

아이가 안 다친 것에 안도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시설, 설비 이런거는 젬병인 나다.


테라스가 있는 1층에 사는 덕에 봄부터 가을까지 텐트를 쳐 두는데

지난여름 엄청난 폭풍우로 텐트가 휘어지고 폭우 피해가 발생했다.

텐트 안에 빗물이 철벅하고 곰팡이가 피었는데

이 텐트를 어찌해야 하지? 펼치지도 접지도 못한 채 한참을 방치했다.


마당에 잡초는 또 왜 이렇게 쑥쑥 자라는지,

맨손으로 잡초를 뽑으려니 힘에 부쳐

커다란 정원용 가위를 사고

양손에 손잡이를 쥔 채 있는 힘껏 팔을 움직였다.

쿠팡 리뷰에 분명 절삭력이 좋다고 했는데,

왜 안 잘리는 거니!

땀을 흘리며 잡초를 베었건만 절반도 못해 어깨가 결려오더니

결국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렸다.


남편이 해 주던 일들이 이렇게도 많았구나.

나름 혼자 할 줄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이렇게 남편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남편의 빈자리는 실로 큰 것이었다.




아빠가 없는 집,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났다.


딸은 맏이로서 책임감이 더 커졌는지

동생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진두지휘하고

엄마 힘들다며 설거지를 도맡아 했고,

고3 시기를 힘든 내색도 없이

내신, 수능, 생기부, 수시 접수..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롯이 혼자 야무지게 챙기고 있다.

(고백하자면, 교과? 학종? 학추? 들어도 들어도 뭐가 뭔지 헷갈리는,

정말 고3 엄마로서 자격 없는 엄마다)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장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마냥 애기 같이 어리광을 피우고

누나의 짜증을 유발하던 애교를 장착했었는데

그 모습이 갑자기 없어졌다.

씻어라, 씻어라 잔소리하던 때가 무색하게 시키지 않아도 씻고,

벌레라면 호들갑 떨고 소리 지르던 아이가

휴지 둘둘 감아 손바닥으로 턱! 쳐서 잡기도 한다.

("이제 아빠 없으니까 벌레는 네가 잡아야 돼!" 라던

누나의 세뇌가 통했을지도..)


아이들이 보기에도 아빠 없는 엄마가 약하고 외로워 보였을게다.





지난 6월, 너무나 감사하게도

남편은 이례적인 인사로 발령 난 지 10개월 만에

다시 수도권으로 오게 되었다.

2년만 있었으면, 아니 3년이라도..

제발 5년까지는 있지 않았으면..

했던 우리에게, 실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넷이 된 우리는,

떨어져 살며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은 만큼

더 아끼고 감사하며 사는 중이다.


어쩌면 너무 감사한 일상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해

누군가가 주셨던 일깨움의 기간이었을까.


부끄럽지만 고백해 보는데,

다가오는 결혼 20주년을 넘어

30주년, 40주년.. 좀 욕심부려 70주년까지?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우리 잘 살아보자.

사랑하는 나의 남편,

그리고 목숨보다 소중한 내 새끼들 ♡


참고한 노래_모든 날, 모든 순간(폴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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