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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아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나의 내면아이(inner child)에게

by 눈이부시게

어린 시절 내 기억 저편 어딘가,

또렷하진 않지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기억 조각들이 있다.


참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완전히 잊혀지지 않고 슬쩍 사라졌다가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 한쪽에 한참을 맺혀있는 기억,

어느 순간 소환된 나의 내면아이.





엄마가 장난감을 사준 이유는


초등학교(그 당시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

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

분명 살던 곳 그 어디쯤, 천이 있던 어딘가.

워낙 어린 시절이었기에

어딘지 알지도 못하고 쫄래쫄래 따라나섰던 나에게 엄마는

갖고 싶은 것을 말하라 했다.

아무 생각 없던 소박한 나의 소장욕구는 '종이돈'.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많이 갖고 놀던

종이인형과 함께 종이돈이 소위 '핫'한 놀잇감이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종이에 동전부터 지폐까지 가득 그려진 돈.

평소 갖고 싶었던 종이돈을 손에 쥐게 된 나는 마냥 즐거웠고,

신나서 엄마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고 걸어 뚝방길에 나란히 앉아,

나는 종이돈을 하나씩 뜯고 놀기에 여념이 없었고

엄마는 가만히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무심코 올려다본 엄마의 눈은

공허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그런 감정을 알지 못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감히 말을 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혼자 조용히 종이돈을 가지고 놀았다.


그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혼도 하기 전 덜컥 나를 임신한 대가로

친정 식구들과 담을 쌓고

경상남도 저 멀리서 경기도까지 오게 된 엄마.

시어머니라는 사람은 오만가지 심술을 다 부리고

남편은 한량에 손찌검도 일상이라

약한 몸으로 일하는 것도 벅찬데

폭행 앞에 아이는 번번이 유산되어

나에게 연년생 동생부터 여러 동생들이 있을 뻔도 했으나

실제로는 여덟 살 차이 나는 동생 하나뿐이다.


가게에 달려 있는 좁은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네 식구가 엉켜 살았던 우리.

꿈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잠결에 종종 들었던 말들 증 '농약', '쥐약'이라는 말도 뇌리에 남아있다.


어떤 순간마다 스쳐가는 그 장면.

엄마는 왜 그날,

나에게 갖고 싶은 것을 사준다고 한 걸까.





전복죽 한 그릇


난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역마살이 있나 싶을 정도로 여행을 사랑하고,

여행을 위해 계획하는 피곤함마저 즐겁다.


하지만, 예전엔 내가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어린 시절의 여행이라고 하면 아빠의 지인, 가족들을 따라

인근 계곡으로 놀러 가 숯불에 고기 구워 먹고

울퉁불퉁한 자갈 위에 펼친 텐트 위에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강도 10의 지압판에 누운 듯

아파하며 잠을 자는 것이 다였기 때문에,

집을 떠나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더구나 그런 여행에 아빠는 우리를 데려만 갔을 뿐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노름에 빠져있었고,

엄마와 나, 동생은 하릴없이 텐트에 앉아있거나

계곡에 가서 노닥거릴 뿐,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빠를 빼고 나머지는 모두 뼛속까지 대문자 I 성향이다.

그렇게 아빠의 친구 가족들과 어울려 가도

우린 썩 쉽게 어울려 놀지 못한 채 겉돌았다.


그 어느 날도,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함께 여행을 아빠만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었다.

배가 고픈 나와 동생은 엄마와 식당을 찾아 배회했다.

그 옛날 계곡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을 턱이 없었다.

대부분 백숙이나 보신탕을 파는 곳들이었고

겨우겨우 식사류가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간 우리.

메뉴판을 본 엄마가 당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망설이다 전복죽 한 그릇을 주문했다.

메뉴판에서 가장 저렴한 메뉴, 전복죽.


이윽고 우리 셋이 앉은 식탁에 전복이 몇 점 들어있지도 않은 전복죽이 올라왔고, 우리 모두 허기가 가시지 않은 채 가게를 나왔다.


그날 이후 한 번도 그날의 얘기를 엄마와 나눈 적은 없지만

아이를 낳고 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얼마나 미안했고, 또 속상했을까 싶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그 허름한 가게의 냄새,

셋이 와서 하나만 주문하는 우리를 대하던 주인의 냉담한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초라한 차림새의 모녀가 고깃집에 들어가

"저희 애 생일인데, 죄송하지만 고기 1인분만 시켜도 되나요?"

주눅 들어 묻는 엄마에게 사장이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고

푸짐한 한 상을 차려주는 모습,

앳된 임산부가 카페에서

"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런데

조각케이크 하나만 먼저 주시면 나중에 아르바이트해서 갚을게요."

하는 말에 홀케이크를 정성껏 포장해 손에 쥐어주는 사장의 모습이 담긴

실험카메라 영상을 볼 때면 절로 그날의 기억이 돋아난다.


그날의 우리도 그런 모습이었을까.

실험카메라 속 사장님을 만났다면 엄마가 우리에게 조금은 덜 미안했을 텐데.




48색 티티파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기껏해야 12색, 24색 크레파스가 전부였던 문구류에

획기적인 바람이 불었다.

바로 48색 티티파스가 등장한 것.

친구들이 하나둘씩 학교에 48색 크레파스를 들고 나타날 때마다

금색, 은색도 있고 뾰족하게 만드는 도구도 들어있던 48색 티티파스가 부러워 밤잠을 설치곤 했다.


어느 날, 나에게도 48색 크레파스가 생겼다.

큰맘 먹고 엄마가 사준 거다.

케이스부터 뽀대 나게 손잡이가 있어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따로 들고 다닐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크레파스를 학교에 들고 갔던 그날,

다른 친구들 것만 부럽게 바라보던 이전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열심히 금색, 은색까지 칠해가며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금과 은이 어울리지 않는 곳인데 말이다.


티티파스를 들고 하교하는 길,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버스 맨 뒷좌석에 크레파스와 학교 모자를 등뒤에 놓고

엉덩이를 대고 앉아 덜컹거리며 집을 향했다.

평소 친구들이 버스를 탈 때면

굳이 크레파스를 손에 들지 않고

의자에 놓는 것마저도 부러웠던 나였기에

나도 그 느낌을 누리고 싶었다.

왠지 버스 안에서 크레파스를 손에 꼭 쥐고 있으면

너무 크레파스를 아끼는 걸 들킬 것 같았달까.


버스는 몇 정거장을 거쳐 이윽고 집 근처 정류장에 다다랐고,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소중한 내 크레파스를 향해 뒤를 돌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크레파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것이 없다.

순간 머리가 쭈뼛 솟았다.

얼른 몸을 숙여 좌석 아래를 보니

버스 등받이와 방석 사이 틈으로

얇은 크레파스 통이 쏘옥 빠져

손잡이 부분이 버스 방석 뒷부분에 걸쳐져 있었다.


지금과 달리 난폭 운전이 아무렇지 않은 시절,

길마저 포장이 매끄럽게 되지 않아

과속방지턱을 한번 넘을라치면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여덟 살 아이가 있는 힘껏 손을 뻗어 보았지만

유독 키 작고 팔도 짧았던 내 손엔

좌방석 사이에 단단히 낀 크레파스가 통 닿질 않았다.


얼마간 씨름을 하던 사이, 내려야 할 정거장을 두 개나 지나쳐 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과 서러움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직 나의 세상은 집을 기준으로 버스 한 정거장 정도의 반경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세 정거장쯤 지나갈 때쯤부터는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네 번째 정거장에서 크레파스를 포기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이끌고 버스가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가며 서럽게 울었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던 엄마는 깜짝 놀라며 나를 다그쳤다.

울어? 왜 그쪽에서 와? 왜 이렇게 늦었어?

너무 복받쳐올라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아 꺼이꺼이, 크레파스를 놓고 내렸다고 말했다.

귀한 48색 티티파스를 놓고 내린 속상함,

내릴 곳을 지나쳐 낯선 곳에서부터 걸어왔던 두려움,

버스에 엎드린 채 용을 쓰느라 고갈된 체력..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버스 기사 아저씨 좀 너무하네.

버스 안에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어린애가 그렇게 울면서 엎드려 애를 쓰고 있으면

잠시 정차해서 그거 하나 빼줄 수 없었던 건가?

이제 생각하니 아저씨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어른들도 야속하다, 정말.

나는 나중에 어린아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꼭 도와줘야지!




아홉 살 인생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가게의 유리창이 온통 박살이 났고,

바닥은 시뻘겋다 못해 검붉은 색으로 변한 꾸덕한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아빠는 손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전혀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여러 번의 경험치로 간밤에 엄마 아빠가 싸웠구나, 눈치를 챘다.


하필, 전날부터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꾸룩 거리던 배는 아침까지 낫질 않았고

이대로 학교를 가기에는 힘들 것 같았지만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배 아프단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주섬주섬, 혼자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가서도 뱃속에서는 천둥이 쳤고

시간이 갈수록 요동을 치더니 급기야 옷에 실수를 해버렸다.


2교시 후 우유 급식 시간,

우유를 가지러 가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옆자리 친구에게 내 것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날 수업이 마칠 때까지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있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하필, 담임 선생님이 잘한 사람에게 표를 하나씩 나눠준다며

친구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이름도 불렀다.

말 잘 듣는 학생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부르심을 무시할 수 없었고

엉거주춤 일어나 교탁을 향해 걸었다.


"어! 이게 무슨 냄새야?

선생님! 얘 오줌 쌌어요!"


옆자리 남자아이가 얼룩진 내 자리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던 아홉 살은

"아니야! 오줌 안 쌌어!!"라고 소리를 질렀고,

남자아이는 여전히 오줌 쌌대요~ 하고 놀려댔다.

아니라고 계속 으름장을 놓았지만,

사실은 속으로 다행이다, 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차라리 오줌 싼 아이가 된 게 나으니까.


그 상태로 집에 돌아온 나에게서 풍기는 악취에 엄마는 당황했다.

1교시부터 반나절동안 옷 속에 감추고 있던 묽은 변은

여린 엉덩이를 짓무르게 하다 못해 벌건 발진을 돋게 했고

한눈에 봐도 한두 시간 뭉개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 걸 알아챈 엄마는

전날부터 배 아프다 했던 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 보며 나갔던 아침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으리라.


참으로 아픈 아홉 살 인생이었다.




그날의 코디는


내가 아홉 살, 2학년일 때 남동생이 태어났다.

내 눈에 정말 예쁘고 귀여운 아기였고,

동생을 보고 싶어서 학교에서 꾀병을 부려 집에 일찍 간 날도 있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는 스물셋,

동생이 나랑 여덟 살 차이.


아마 그때의 엄마는 아빠로 인한 스트레스와

출산으로 인한 우울감, 가게 일로 인한 피로가 가득했을 거다.

그런 엄마의 스트레스 표출 대상은 주로 나였다.

엄마는 아니라 하겠지만,

유독 엄마가 금사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날이면

나를 더욱 많이 때리고 야단쳤다.


아직도 짧은 파마머리에 금사 티셔츠, 청바지를 떠올리면

엄마의 화난 얼굴과 매질이 동시에 떠오른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어릴 적 나는 꽤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엄마가 바쁜 와중에도 옆에 끼고 공부를 가르쳤기에 그렇다고 한다.

학교에서 나름 내 이름 석자를 대면 모르는 학생이 없었고,

선생님들은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매 학년 학급 반장, 부반장을 도맡아 했고

6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도 맡았다.

합창부에서도 활동하고, 학교 교가를 녹음하는 다섯 명에도 뽑혔으며

글짓기 상, 그리기 상, 만들기 상, 학력상 등

학교의 상이랑 상은 내 차지였다.


엄마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

본인이 받은 스트레스와 화를

딸을 통해 풀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이든 잘하길 원했고,

때로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잔소리는 물론,

회초리와 손으로 때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잘해야만 했다.


6학년 중간고사였던가. 시험을 보고 돌아가는 길,

- 그때는 수행평가를 보는 지금과 달리,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도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봤다.

전 과목 시험 중 4개의 문제를 틀렸다.

항상 '올 all백 100'을 강조하던 엄마에게 야단맞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엉엉 울었고,

친구들은 "시험 잘 못 봤어? 어떻게 해.." 하며 위로를 건네왔다.

그 앞에서 "나 어떻게 해.. 집에 못 가. 엄마한테 맞을 거야.." 하고 울면

아이들은 꼭 묻는다. "몇 개나 틀렸는데?"

그 질문에 "네 개.." 하고 대답하자, 친구들이 말한다.

"재수 없어."


재수 없어도 어쩌겠는가,

나는 여지없이 혼났는걸.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당시의 엄마의 모습,

특히나 즐겨 입던 그 옷은 아직까지 내 뇌리에 박힌 무서운 기억이다.




내면아이가 한두 번씩 올라올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짠하고 안쓰러워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른의 모습으로 그 아이 옆에 설 수 있다면

품에 꼭 안아 다독여주리라.


참고한 노래: 어른아이_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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