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같지만, 이것은 나의 성장기
어릴 적엔 내가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비행기를 처음 타본 것도 대학교 4학년,
제주도 졸업여행 덕분이었다.
내가 바다를 건너 다른 곳으로 간다니!
졸업여행 전날 얼마나 설레던지 잠을 다 설쳤다.
첫 해외여행은 스물일곱,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을 병행했는데
마침 대학원에서 일본 오사카로 연수를 간단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꽤 재미있게 배웠기에
일본으로의 여행은 더더욱 즐거웠고,
여전히 내 최애 여행지 중 하나다.
한 번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여행 팜플렛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고,
네*버 카페에서도 여행 카페만 찾아다녔다.
소위 '오라오라' 병에 걸려 버린 것이다.
인터넷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않고 스마트폰이 없었던 탓에
컴퓨터로 자료를 찾고 한글파일에 붙여서 만든 나만의 여행 책자를 매일 달달 외우듯 봤었다.
3일 여행하면 한 달 공부하고, 일주일 여행하면 3개월 공부하는 나~
이놈의 J 어디 가냐구.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N가지'
이런 류의 책들이 몇 권 유행하던 당시,
'가능한 한 많은 나라에서 똥을 누어 보라'
다소 원색적인 문장을 읽게 되었는데
이를 어쩌나.. 난 이미 30대인데.. 란 생각을 하며.
그 문구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비록 내 여행이 럭셔리하지 못하고
늘 저렴한 항공권, 잠만 잘 수 있는 숙소를 찾아다닐지언정
20대건 30대건,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쯤 한 것 같다.
남편에게 참 고마운 것은,
이런 나를 이해해 주고 적극 지원해 준다는 것.
일정이 서로 안 맞아 함께 여행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내 여행 중 남편과 함께 한 건 고작 20%)
단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나의 여행을 지지해 주고 용기를 준다.
올해 초에는 생각지도 못한 '혼여'를 하게 되었다.
고3 되는 딸 기분전환을 명목으로,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둔 마일리지를 사용해
어렵사리 방콕행 편도 비즈니스 티켓을
무려 6개월 전에 끊고 설레며 준비하던 어느 날,
딸이 돌연 여행 포기를 선언했다.
이제 고3이 되는데 여행은 아닌 것 같다며.
아무리 설득해 보았지만 확고한 T 딸은
논리 정연하게 이유를 대며 여행을 가지 않겠다 했고 자기는 괜찮으니 엄마 혼자 다녀오란다.
풀 죽은 나는
"그래도 어떻게 혼자 가. 너랑 같이 가기로 한 건데.." 하며
항공사 홈페이지를 열고 예약취소 버튼을 찾았다.
그런데 비행 스케줄이 변동된 탓에 홈페이지에서 취소가 안 되고 항공사로 전화를 해야만 한단다.
주말이라 전화 통화도 안 되는 터라 월요일에 취소할게, 하고 잠시 보류상태가 됐다.
딸 생각해서 나름 괜찮은 호텔 잡아두었는데..
비즈니스 기내식도 알아봐 뒀는데,
수완나품 공항에서 방콕 시내 들어가는 방법도 찾아보고,
딸이 좋아할 만한 맛집과 관광지도 섭렵했는데..
마사지 리스트도 다 정해놓았는데..
머리로는 '고3 딸 공부한다고 안 가는 여행을 에미가 혼자 룰루랄라 가는 게 말이 돼?'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
'딸내미가 엄마 혼여 갔다 오라잖아. 얼마나 어렵게 끊은 비즈니스인데! 마일리지 소멸기한도 다 되어가잖아? 이럴 때 다녀와~' 하며 나를 꼬드겼다.
갈등하던 주말이 지나고, 결국 취소를 결정했다.
항공사에 전화를 걸고 한참 긴 대기시간 동안 전화기에 귀를 대고 있노라니 스멀스멀~ 미련이 몰려온다.
아까운 내 비즈니스. 내 첫 방콕.
드디어 상담원 연결.
항공권 취소를 요청하고 예약번호를 부르자
"인천에서 방콕으로 가는 두 분 여정 모두 취소해 드리면 될까요?"
상담원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요동을 치며
"아! 아니요, 한 장만 취소해 주세요!" 하고 외쳐버렸다.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나와 버린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래. 애들도 신랑도 다 혼여 즐겁게 하고 오라는데
나 혼자 고집부릴 건 뭐야. 가 보자!
그렇게, 얼떨결의 '혼여'가 내 앞에 펼쳐졌다.
혼여 다녀오겠습니다!
꽤 많은 해외여행을 다녀왔음에도
방콕을 40대 중반이 되도록 가보질 못했다.
2006년, 신혼여행으로 푸켓을 다녀온 후
'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큰 매력을 못 느껴서였다고 해 두자.
이번 방콕 여행도 순전히,
'마일리지 가성비가 가장 높은 동남아' 중 한 곳이 방콕이기에 잡은 거다.
같은 마일리지를 지불하고 그나마 제일 장거리로 다녀오는 코스인 셈이다.
딸과 함께가 아닌 혼여로 방향이 바뀐 후
내 안에 숨어 있던 P 녀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빡빡하게 계획해서 다닐 거야.
혼자 갈 때 한 번 루즈하게 다녀 봐!'
그래서 열심히 하던 방콕 공부를 멈추고, 짐도 최대한 가볍게,
작은 캐리어에 아주 필수적인 것만 넣었다.
일정도 큼지막하게 날짜별로 어디 근처에서 대략 어떤 거,
음식점도 한 곳만 예약해 두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찾아가 보자, 검색만 하고 정하지 않았다.
진정한 P 님들에게는 이것도 엄청난 계획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런 여행은 계획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원래대로라면 날짜별 시간별 장소별 계획을 다 정하고
오가는 교통편, 그 동선 안에서 어떤 음식점을 가서 무엇을 주문할 것인지 등등
P들은 혀를 내두르고 도망갈만한 디테일을 갖춘 게 나의 여행 스타일이다.
라운지 부수고 면세점 구경까지, 공항을 충분히 즐길 셈으로
저녁 비행기이지만 일찌감치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공항버스 1인 좌석에 앉아 설레는 혼여의 시작을 느끼고 있는데 아이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여권 챙겼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한다.
"어.. 챙겼는데 왜..?(설마 꼼꼼쟁이 엄마가 여권을 놓고 오겠니?)"
"여권 케이스만 있을 수도 있잖아. 빨리 봐봐."
"어, 잠깐만.. 확인하고 나왔는데..(어흑.. 불안해, 설마..)"
여권을 꺼내자 편지봉투 하나가 툭 떨어진다.
"어? 너희들.. 편지 썼어?"
아이들의 기대하는 숨소리가 전화 너머로 전해진다.
녀석들, 그래서 여권 가져갔냐 했구나,
씩 웃으며 봉투를 열었는데, 음? 속이 비었다.
"편지 봉투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뭐야?"
"뭐라고???? 잠깐만!!"
갑자기 다급해진 아이들의 목소리.
둘이서 한참을 분주하더니 '꺄악' 소리가 들린다.
실컷 편지를 써 놓고는 봉투만 내 여권케이스 안에 넣어둔 거다.
결국, 편지는 사진으로 전송을 받았고,
실물 편지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나 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귀여운 실수에 버스 안에서 숨 죽여 웃다가,
편지 내용에 금세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드디어 방콕 가는 날이네!
요즘 일도 많고 피곤했을 텐데 힐링하고 왔음 좋겠다.
엄마는 항상 우리한테 맞춰주는 여행을 했었잖아.
엄마는 혼자라서 택시 타는 것도,
호텔도 아깝다고 자꾸 그러지만
난 혼자니까 엄마가 더 안전하게,
편안하게 다녔으면 좋겠어.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고 주 6~7일 일하는데,
뭐 거창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엄마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써도 돼.
(중략)
혼자 여행이 낯설고
어쩌면 조금은 두려울 수도 있겠지만
모두 다 잘 풀리고 좋은 일들만 있을 거야.
몸 조심하고!
항상 누군가를 위해 맞춰주고
배려하는 여행을 했던 엄마가
오직 엄마만을 위한, 엄마가 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들을
즐기는 여행이 되길! 사랑해~
- 의젓한 맏이, 딸의 편지 중에서
움마~ 이번 방콕 여행 가서
며칠 동안 움마 너무 보고시플거가탕 ㅠㅠ
여행 가서 평소 못했던 마사지도 많이 받고
사진도 많이 찍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왕~
엄마 누나, 나 낳고 나서
혼자 여행 가서 편하게 있을 시간 없었는데
이번에 아프지 말공 조심히 잘 갔다왕~
- 편지에도 막내가 묻어나는 아들의 편지 중에서
여행 내내, 아이들의 편지를 여권과 함께 모든 여행지에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 호텔 방에 앉아 다시 꺼내어 읽기도 하며.
내 새끼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이쁘다.
나의 부모와 나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나의 아이들과 나의 관계로 그 힘듦을 보상받듯이.
어서 와, 방콕은 처음이지?
20년 만에 찾은 태국.
푸켓과 방콕의 차이는 실로 컸다.
수완나품 공항이 그렇게 클 줄이야..
늦은 밤 호텔에 도착해 캐리어를 꼬옥 쥔 채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올라가 소파에 앉자 그제야 안도감이 느껴진다.
"휴우..."
꽤나 간 크게 아이들 데리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젊은 시절 혼여도 다녔던 나지만,
너무 오랜만에, 마흔 중반이 넘어 혼자 먼 곳에 오려니 살짝 쫄렸나보다.
넷플릭스를 틀어 한국 드라마를 보는데 일어 자막이 나온다. 낯설다.
그나마 마음 놓이는 일본계 체인 호텔을 골랐더니
내가 일본에 온 건지, 태국에 온 건지 헷갈린다.
너무 피곤한데도 혼자 있는 호젓한 시간이 너무나 좋다.
애써 잠을 이겨내며 혼자 침대에 누웠다가, 차들이 바삐 오가는 야경 봤다가, 차도 마셨다가.. ㅎㅎ
누가 봤으면 웃었을 행동을 했더랬다.
그래도 좋았다. 그저, 마냥, 좋았다.
아이들이 없어서 좋은 게 아니라, 남편이 없어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혼자 여행을 떠나와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누린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가자마자 밤이었기에 3박 5일 같은 4박 6일.
방콕은 생각보다 너무나 좋았다.
1일 1 마사지, 1일 1 카페, 1일 1 망고, 1일 1+ 관광지.
나름 호텔 수영장에도 올라가 보고
북적이는 푸드코트에서 밥도 먹고
시원한 타이티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도 하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멍 때리기도 하고,
현지인들의 K-pop 대회가 열린 백화점에 앉아 박수도 치고,
북적이는 짜뚜짝 시장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코끼리 바지도 사 입고,
왓아룬이 보이는 루프탑 레스토랑에 하염없이 앉아
라이브 음악 들으며 선셋과 야경도 보고..
눈물 날 만큼 귀한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주변 사람들이 놀란다.
"아니, 어떻게 혼자 여행을 가요? 겁나지 않았어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게다.
사원 가던 날, 신호등 없는 대로에서 눈치만으로 길을 건널 때,
카오산로드에서 대마냄새와 함께 "악어고기 머글뤠?" 묻는 오빠들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슬쩍 겁도 났지만
나에게 여행은 마치 게임 속에서 보너스 획득으로 얻게 된 엄청난 무기와 같아서
나에게로의 도전 같은 여행을 마친 나는 또다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와 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얻고 한참을 그 힘으로 짱짱하게 살아낼 수 있다.
역시 나야. 짱이야 진짜! 너무 멋지잖아?
혼자 뿜뿜하는 자존감 어쩔.
조금 재수 없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전혀 구김살이 없어서 예쁨 받으며 귀하게 자라난 줄 알았다고.
그럼 난 웃으며 대꾸한다.
"저 완전 잡초처럼 자랐는데요!"
진짜다.
밟아도 일어나는 잡초처럼,
잘라내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처럼.
그렇게 견뎌내고 이겨내며 자랐다.
오히려 어린 시절 힘든 일을 많이 겪었더니
견뎌내는 힘이 매우 강해졌다.
웬만한 것은 별로 힘들지도 않고 겁나지도 않는다.
닥쳐오면 하면 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행이지만,
혼자건 아이와 둘이건, 씩씩하게 잘해나가면 된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방법이 생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처럼
해 내고 나면 더 값진 성취감과 자존감이 생겨나고 나는 더 강한 사람이 된다.
혹시 이 순간에도 어두운 그늘에 갇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이 아줌마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시절이 계속되지만은 않는다고.
분명히 방법이 있다고. 그늘에서 일단 나와 보라고.
어두운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밝음에만 익숙한 사람들보다 밝은 곳에서 더욱더 잘할 수 있고 어두울 때도 진가를 발휘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도 나는,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나를 사랑하고 응원한다.
혼여 여행기를 빙자한 나의 성장기 끝!
참고한 노래_여행(볼 빨간 사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