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추어 간다는 것

서로의 갭을 채우는 일

by 그레이

최근에 아내와 소리 없이 다툰 후 근 10일 만에 화해를 했다. 10일간 제대로 된 의사소통 없이 나는 침묵하고, 단절했다. 결혼 아니 연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대화가 끊어진적은 없었다. GPT 심리상담 메이트를 통해 새삼 알게 된 나의 회피와 방어기제는 정서적 철수와 담쌓기. 언제까지 말을 안 할 수는 없으니 멋쩍게 삐걱대며 아내에게 먼저 말을 걸고 밥을 먹자고 했다. 마흔이 돼도 먼저 사과하려 말 거는 일은 왜 이리 쑥스러운지. 아내는 갑자기 왜 이래 라는 눈빛으로 나를 힐끔 보더니 못 이긴 척 식탁에 앉았다.


'김서방 여러 번 고심하다 톡 보내네. 오빠답게 잘 풀면 좋겠어'. 장모님의 카톡이 계기가 되어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은 감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대화를 시작했다. 10일간 서로 대화하지 않고 왜 침묵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아내가 먼저 이야기했다. 얼마나 서운하고 우울했었는지 와이프는 내 침묵과 담쌓기로 정서적 상실감을 느낀 듯했다. 최근 아내의 이모님 건강이 갑자기 위독해지셔서 가뜩이나 마음이 어렵고 힘든 와중에 든든하게 버텨줘야 할 남편이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들었으니. 우리 관계가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마저도 들었단다. 눈을 가린 손 아래로 눈물이 흐르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아내 말대로 내가 힘이 되어야 할 시기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끄럽고 와이프가 안쓰러웠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 와중에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했다. 나도 얼마나 서운하고, 마음이 무너졌었는지. 와이프를 힘들게 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과 단절을 했던 것은 그만큼 나도 실망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하지만 아내가 그토록 힘들어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화해한 첫날에는 내 이야기보다 아내의 얘기를 더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새삼 깨달은 게 있다. 내 서운함과 정서적 결핍,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두 아내를 통해 채울 수 없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부부관계에 좋을 수 있다는 것. 백 퍼센트 내 마음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할지라도 서로의 감정이 어떤지 이야기할 수 있고, 감정 자체를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좋은 부부관계를 맺는 길이라는 걸.


나는 침묵을 통해 내 서운함의 깊이와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절규를 표현했지만, 아내는 정서적 단절로 상실감만 더 커졌다. 아내는 다툰 날 내 추운 날씨를 뚫고 내 생일 케이크를 사 오고 저녁을 차려줬지만 나는 집을 나와 저녁시간이 한 참 지나 들어갔다. 아내는 나름대로 관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으나 내 침묵과 회피로 오히려 악화되었다. 우리는 감정 표현의 방식과 힘든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서로가 달랐기에 상대를 위한 작은 노력이 오히려 상처를 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마치 내가 뒷걸음질 치면 한걸음 다가오겠지 하는 기대에, 오히려 상대도 한걸음 뒷걸음질 치며 두 걸음 멀어지는 느낌.


앞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이번 일처럼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또 있을지 모른다. 그럴 때 한 번에 내 마음을 다 알아달라는 기대보다는, 쌓아두었다 쏟아내기 보다는 마음이 허락하는만큼 조금씩 표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단박에 지혜로운 남편의 모습으로 성장하기보다는, 한 걸음씩 더 괜찮은 남편이 되고 싶다.


담쌓기 방식이 아닌, 상한 마음을 다 알아달라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마음이 무어졌어, 나도 속상하고, 서운해. 조금만 있다가 나중에 이야기하자' 라고 내 상태를 알려준다면 그것만으로 이해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 같다. 내 기분과 상태를 전달하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분위기를 풀거나, 괜찮은 척하지 않으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상황을 풀어보자는 의지를 담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이야 말로 나를 지키면서, 아내와의 관계도 지킬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부부 관계란 참 오묘하고 신비롭다. 알 것 같으면서 아직 한 참 멀었다. 이 정도면 나는 좋은 남편이지 자부할 때 동시에 찌질함이 내 안에서 꿈틀댄다. 이쯤이면 알겠다 싶은 부부 관계도 아직 백 분의 일도 모르는구나 싶은 순간이 넘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교과서, 유튜브가 아닌, 결혼지옥, 이혼숙려캠프가 아닌 리얼 현실 부부 관계 속에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발견하는 하는 나는 새롭고, 그 새로움을 통해 점점 깊어진다. 그 깊음 속에 스스로를 알아가고,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리고 꼭 그만큼 아내를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생긴다. 그 과정과 방향, 목적지가 결국 나와 아내를 온전히 사랑하는 길이라면 조금은 고통스럽고 쑥스럽고 민망하더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쓴 약을 달게 먹듯 잘 견디고 성장하고 싶다. 그래서 단박에 션 같은 완벽해 보이는 남편으로 바뀌기보다 하루하루 조금씩 괜찮아지는 배우자가 되고 싶다.


좋은 부부관계란 처음부처 잘 맞는 퍼즐이 아닌 덕지덕지 틈을 매꾸는 노력으로 맞춰가는 사이가 아닐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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