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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우는 밤

새벽에 아이를 달래며

by 그레이
새벽에 우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걷는 밤
그 속에서 삼십 년 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힘들지만 사랑스럽고, 고단하지만 아름다운 시간.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특권이다.


통잠을 잘 자던 아기가 요즘 들어 새벽에 엄마 엄마 부르짖으며 자주 깬다.

애착인형을 품에 안겨주고 등을 토닥이면 대개 다시 잠들었는데 어제 밤은 달랐다.


다리를 주물러줘도, 잠시 품에 안아주어도 좀처럼 달래지질 않았다.

나와 아내 둘 다 제대로 잠을 못 잘까 싶어 아이를 들춰 안고 거실로 나와 몸을 흔들며 달래주었다.


집안을 이리저리 걸으면 조금 진정되다가도 잠시 소파에 앉으면 다시 울음 시동을 걸었다.


'엄마, 엄마...음마, 음마'


무서운 꿈을 꾼 건지, 어디 불편한 건지 아니면 그냥 잠투정인지 알 수 없지만, 다시 일어나 엉덩이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거실 밖 도로 위 가로등을 보며 문득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에 잠에서 깬 나를 엄마가 등에 엎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달래주시던 기억.

뭐가 그리 서러웠던지 나는 엄마 등 위에서 엉엉 울었다.


엄마는 다른 가족이 잠든 방안을 나와 작은 방에서 나를 토닥여주었다. 아파트 창문밖 2층까지 올라온 은행나무 노란 잎과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 그 뒤로 펼쳐진 기찻길까지 생생하다.


삼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밤새 나를 달래느라 제대로 못 주무셨을 엄마의 다음날은 평소보다 더 고단 했겠지.

엄마도 나를 업어 달래주기 위해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킬 때 고되고 힘들었을 테지.

깊은 밤 자지 못하는 아기가 안쓰러운 마음과 얼른 재워야 다음날 산다는 간절함으로 만근 몸을 세우셨겠지.


그래도 몸은 힘들었을 테지만 우는 나를 달래며 엄마는 어쩌면 뿌듯하고 충만했는지도 모른다.



비몽사몽 아기를 안아 토닥이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품 안에 우는 아기를 안을 수 있다는 것. 온전히 내 품에서 안정감을 느껴야 잠을 청할 수 있는 존재를 통해 나는 세상을 품은 어미의 마음을 느꼈다.


삼십여 년이 지나 나도 내 아이를 키우고 나서야 부모의 사랑과 헌신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육아를 하며 새삼 느끼는 것은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생각한다 해도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만큼을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


자식으로 사십 년 살고, 짧지만 부모로도 살아보니 조금 알겠다.

핏덩이를 온전한 존재로 키워내느라 쏟은 사랑은 자식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느끼는 감사함은 부모가 자식을 길러내며 느끼는 기쁨에 결코 비할 수 없다. 때론 몸과 마음이 너무 고될 때도 있지만 아기를 키우며 느끼는 사랑스러움과 기쁨, 희열은 자식은 알 수 없다. 부모만이 느끼는 특권이다.


아내와 내가 사랑으로 만든 생명을 투닥거림과 희생으로 길러내는 시간은 가장 설레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런 점에서 육아는 부모만 겪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아이를 키우며 힘이 들 때마다 이 시절이, 오늘의 순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훗날 인생을 마무리할 때에, 몇 장면으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될 때에, 오늘을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떠올릴 거라 생각하면 왠지 미소가 지어진다.


그저 힘든 육아를 이겨내기 위한 억지 감사가 아니라 정말 내 인생에 이 시절이 가장 찬란한 시간이 될 것 같다.


글을 쓰는 지금도 아이는 몇 번이고 깼다. 어둔 방 안에서 아이의 몸을 어루만지며 달래줄 때 살아 있음을 느끼고, 아이를 사랑하는 나를 느낀다. 그런 나를 똑같은 마음으로 길러낸 우리 부모님이 생각나는 밤이다.


#아빠육아 #육아에세이 #아이를재우며


잠을 설친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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