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네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왔다.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임신 5주째. 극초기에 소식을 알려준 동생네 덕분에 가족 단톡방에도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드디어 한국에 손주가 생긴다는 기쁨이 큰 부모님은 지나가는 어린이집 아이들이 훨씬 더 실감 나게 달리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고, 태아가 콩알만 할 때부터 동생이 올리는 아기의 초음파 사진이나 비디오는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특별한 마음이 되어 임신 30주인 지금까지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게 사는 거지.
우리 부부는 첫째와 둘째 모두 임신하였을 때 안정기에 들어선 12주가 지나고 양가 가족에게 알렸다. 모든 게 확실해졌을 때 소식을 전하는 것이 혹시나 모를 상황에 서로의 감정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가족 단톡방에서 소식을 듣고는 조카가 생긴다는 기쁨과 신기함과 함께, 한편으로 너무 이르게 소식을 전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도 되었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첫째와 둘째 사이에 9주 즈음 유산을 한 적이 있다. 집에서 하혈을 하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후 한참 훗날 그런 적이 있었다고 말하며 넘어간 적이 있다. 그래놓고 아주 담백했다고. 나만 조용히 지나가면 누구 하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고요히 지나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힘든 소식은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는 쪽 아니면 타인에게 가십거리만 될 수 있으니 말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어차피 힘들 때는 아무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단정 지으며 불필요하게 마음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문 잠그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좋지 않은 소식이 될 거라면, 일단 보류 후 확실해졌을 때 알려주는 편이 깔끔하고 효율적인 것이었다.
어느 날, 스물다섯 한국을 나왔던 첫 해에 썼던 노트가 찍힌 사진을 발견하였다. 이미 버리려고 구겨버린 종이였던 듯 구깃구깃한 A4 종이에는 손수 그린 그 달의 달력과 그 안에 드문드문 적힌 스케줄. 달력 아래에는 진한 네임펜으로 오글거리는 리스트가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다 괜찮아, 좋아라고 말하기
잘 지내, 재미있어라고 말하기
독해지기 강해지기
내 앞길이 먼저
우울한 소리 할 거면 전화하지 말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게
가시 세우기
웃기. 다 괜찮으니까
(제 손은 다 오그라들었는데, 독자님 손은 무사하신지..)
아마 이때부터였나 보다. 잘못 살기(?) 시작한 게. 리스트를 보아도 혼란스러운 듯 메시지가 중구난방이다. 마지막은 그래도 웃자고 하는데, 어두운 기운을 지울 수가 없다.
잘 지내냐는 질문이 버튼을 누르면 기계처럼 응 잘 지내, 여기 좋지, 재미있어라고 말하는 연습. 사방에서 공격이라도 받는 듯, 무너뜨린다. 가시 세운다 라는 어휘를 선택하고는, 자꾸 괜찮다고 적어둔 혼잣말들.
앞가림도 버겁다며 일단 나만 생각하자는 이기심으로 무장하고, 독이 잔뜩 든 가면으로 버티던 시간은 덜 된 인간으로 나이만 먹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마음과 [가시를 세우자]와 같은 상충되는 다짐처럼 충돌하던 자아가, 삶이 좀 나아진 지금까지도 아직 덜 정돈되어 사람이나 삶을 대하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닌지.
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배운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눈 면 반이 된다는데. 벽을 쌓고, 뻑뻑한 문으로 살아오는 동안 놓친 [배가 되고 반이 되는 순간] 은 얼마나 될까.
자꾸만 입을 다물던 시간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가족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딸, 누나가 되었을지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내 앞길만 보고 살아오다가, 이제는 정말 나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그렇게 살아서 뭐 어쩌자는 건지.
동생네는 안정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소중한 순간을 나누었다. 삶의 모퉁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순간까지 함께할 용기를 보태어, 지금.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우리가 거기 있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웠다, 믿어주어서.
누나와는 달리,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일찍부터 나누어 준 덕분에 온 가족이 더 오래, 더 자주, 함께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가야,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건강히 세상에 나와 만나자.
모두 사랑으로 널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