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곳 초등학교는 Public Speech 준비가 한창이다. 작년 아이가 킨디일 때에도 엄마들의 단톡방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숙제. 나이도 어린데 가능할까 했던 그 과제가 올해에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한 학년 올라간 만큼, 다른 숙제들도 있는데, 스피치 준비라니. 귀찮은 마음에 함께 준비하는 걸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얼마 전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직장상사를 만났다. 정확히는 또래 워킹맘으로 직급으로는 까마득한 직장 상사이다. 본사가 있는 미국에서 발령받아 호주로 왔는데, 무려 VP(Vice President)라 고작 시니어 데이터 분석가인 나와는 사실 직접 교류할 일이 별로 없는 자리.
멀디 먼 직급과는 달리, 버스 정류장 한 정거장 차이만큼의 거리에 살고 있어 간혹 출근길 버스에서 만난다. 안타깝게도 그럴 때마다 머리도 입도 잠시 굳는다. 안 그래도 방금 어린이집에 둘째를 내려놓고 버스 시간에 맞추어 정류장으로 부랴부랴 뛰어 겨우 버스에 탔다. 이제 겨우 숨을 고르며 겨울에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중에 도착한 다음 정거장에서 여자를 만나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또래인 듯 하지만, 또래 아닌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무수한 고민 끝에 비슷한 나이의 아들들을 키우고 있다는 접점은 꽤 유용할 때가 많았다.
요즘 애들 학교에서 숙제가 너무 많아요. 라고 말문을 열었다.
서로 다른 학교를 다녀 아이 학교 생활이 어떤지, 그쪽 학교는 어떤지 묻다가 문득 미뤄두었던 스피치 숙제가 생각나 말을 꺼냈다. 여자의 대답은 시원했다.
아이가 숙제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제가 봐준 적은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스피치도 해야 한다는데, 그냥 준비 없이 나가서 하라고 했어요. 애들이 너무 어리잖아요.
여자는 하버드를 나왔다. 이미 대기업에서 여엿히 VP의 자리에 올랐고, 자신 있게 아이들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키우고 있었다.
[해외에서 출근하는 회사원]이라는 관문을 마침내 통과하던 때는 서른이었다. 보통 지금의 내 나이쯤이면 적어도 매니저나 팀장 정도는 할 텐데, 아직 실무진으로 [열심히] 일하는 자리에 있다. 겨우 보통의 삶까지 오느라 걸린 시간은, 나의 선택이기도 했다.
얼마 전 Director와 1:1 면담에서 "매우 효율적이고,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물론 칭찬의 뜻으로, 일을 잘해주어 고맙다며 한 말인데,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효율적인 사람. 성과 내기 좋은 자원. 하지만 올라가고 싶으면 그 이상으로 계속해서 증명해야 하는 머리 하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던 그의 말은, 이상한 문장이 되어 머리 뒤에서 맴돌았다.
인생은 원래 출발점이 다른 경기이다. 저 앞에 있는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두려운 것이 생겼다. 바로 내 아이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출발점이 대물림되는 것.
그래서일까. 자꾸 두리번 거린다. 이민자로서 가장 최선의 자리라 믿었고 가장 편안한 지금의 자리에서, 또다시 길을 잃은 기분이다. 올라가야 하는지, 올라가고 싶은지, 올라갈 수는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30년 후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나처럼 회사에서 부품처럼 일하며 느끼는 안락함과 모호함 사이에서 길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문득, 작년에 아이 스피치를 준비할 때, 반복하여 연습하면 잘하게 될 거라고, 아이는 그리 관심 없을 [희망]을 주며 힘들게 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하버드 나온 엄마도 저리 자유분방하게 키우는데, 중간에서 아등바등 살면서 내가 뭐라고. 마치 나의 아등바등한 삶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행복을 누리는 여유보다, 좋은 학생,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성취하는 법을 배웠으면 했는데, 마치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도 시키는 일이라면 [힘들어도 열심히] 해야 하는 사람으로, [참고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 같아 미안했다.
아이의 미래는 내 것보다 더 밝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숙제도 함께 봐주었지만, 내면이 단단치 못해 그 과정에서 욱하고 올라오던 나의 화는, 결국 아이를 더 불행하게 했을 것이다.
정작 두려워해야 하는 건, 아이가 알아서 어린이다운 총명함으로 누리는 반짝이는 행복에, 세상의 잣대를 바늘처럼 들이밀며 푹푹 터뜨리는 엄마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발선의 대물림이 아니라, 아이의 고유한 유년시절을 헤집는 일 말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열심히] 말고, 다른 종류의 [열심히]도 있다. [즐겁게], [행복하게] 너만의 것을 찾아간다면, 위도 아래도 없이 너는 그저 온전한 네가 될 텐데.
그런 환경을 제공하는 단단한 울타리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