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은 아이가 학교에 교복이 아닌 캐주얼 옷을 입고 등교하는 mufti day였다. 문제는 학교 앱에 올라오는 여러 가지 공지 사이에 끼어있던 "이번 주 금요일에는 올림픽을 맞아 호주의 대표색인 초록색과 골드가 어우러진 사복을 입고 오세요."라는 메시지를 목요일 아침에야 제대로 알아차렸다는 것. 정신머리가 없지만, 천만다행인 건 전 날이라도 알았다는 점이다.
마침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라 점심시간에 짬 내어 집 근처 몰에 다녀오기로 한다. 온라인에 찾아보니 호주 이마트 개념인 K mart라는 곳(혹시 몰라 언급하자면 여기서 K와 Korea는 관계가 없다)에 7-8월의 추운 호주 날씨에 잘 맞추어 나온 어린이용 점퍼가 있어 들렸다. 이런 행사가 있으면 사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한 발, 아니지, 한참이나 뒤처져 혼자 달리기를 하는 마음으로 가보았는데 역시. 점퍼도, 스카프도 모두 동이 났단다.
할 수 없이 쇼핑몰 안의 파티샵 같은 데에서 파는 반팔 운동용 셔츠를 구매했다. 디자인은 파티샵에서 파는 것 치고는 꽤 그럴싸했고, 아이가 내복을 입거나, 겉에 점퍼를 잘 입으면 하루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해야 할 쇼핑을 손쉽게 마치고 나니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고, 밖으로 나온 기분도 낼 겸 테이크 어웨이로 먹을 걸 사갈까 둘러보는데 한국 분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K-pop, K-drama에 힘입어 K-food도 이곳에서 꽤 유행을 타고 있는데, 덕분에 몰에 들어온 분식집에서는 한강 라면기계처럼 즉석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떡볶이, 김밥, 핫도그, 소떡소떡 등을 팔고 있었다.
음식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가격에 흠칫 놀라지만 요즘 물가가 다 그렇지 않겠는가. 떡볶이 1인분, 기본 김밥 한 줄을 포장해서 가기로 하고 16불을 결재했다.
집에 와 설레는 마음으로 떡볶이를 열어보았다. 아이들은 각자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남편은 회사로 출근을 한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 재택근무의 묘미가 이런 거 아니겠어 행복한 마음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집에서 일하면서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삶이 감사하다 생각하며 뚜껑을 열었는데.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포장용 용기 반쯤 차 있던 떡볶이 국물 속에 떡들이 이산가족처럼 헤어져 초라하게 동동 떠다닌다. 메뉴에서 보던 그림은 이렇지 않았는데. 혹시 내가 이 4센티미터 남짓한 짧고 댕강한 떡 하나당 1불씩을 지불하는 사치를 부린 건 아닌가 싶어 개수를 세어보기까지에 이른다.
하나, 둘, 셋, 넷...
떡볶이를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그동안 보통 1인분의 떡볶이에는 떡이 몇 개가 있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여백의 미가 가득한 떡볶이 국물 속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떡들을 줄지어 놓고 센다. 결과는 (두구두구두구)...... 9개.
적은 거 아닌가? 내가 많이 먹는 건가? 호주의 물가, 인건비 등을 고려하며 애써 이해해 보지만 그 와중에 기본 김밥 한 줄 값이 8.5불이라는 사실까지 문득 서러워지는 건 왜였을까.
해외살이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떡볶이나 김밥처럼 향수가 짙게 남은 음식들은 자꾸 여행 온 사람처럼 한국의 물가와 비교를 한다.
초등학생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먹던 컵볶이. 일반 종이컵보다 검지 손가락 두 마디정도 높은 종이컵에 한 국자면 충분했을 걸 반 국자 더 얹어주시던 마음은 그때와 지금의 가격 사이, 혹은 거기와 여기의 가격 사이에서 어떻게 환산하면 될까.
중학교 교문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떡볶이 집. 시험 기간 건너편 공립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종종 혼자 가서 먹곤 했는데 무뚝뚝한 아주머니셨지만 떡볶이 1인분을 시키면 쫄면에 야끼만두 한 개를 넣어서 주셨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저녁 시간 종이 치자 마자 친구들과 우르르 교문 밖 100미터쯤에 위치한 분식집에 달려가 사리면에 밥까지 비벼먹었다. 푹푹 찌던 여름밤에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던 겨울밤에도, 매번 풍족하게 먹고 배를 두드리며 교실로 돌아가 야자시간을 견뎠다. 덕분에 든든히 추억을 쌓았다.
이 외에도 동네 시장에서 먹던 떡볶이. 학원가에서 먹던 떡볶이. 아파트 단지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포장마차 분식점에서 먹던 떡볶이. 종로에서 먹던 떡튀순(떡볶이, 튀김, 순대 세트).
가장 좋아하는 음식답게 무수히도 많이 사 먹으며 단 한 번도 떡의 수를 세어 보아야겠다고 느꼈던 적이 없던 시간.
그리운 건 1인분에 9개 넘는 떡볶이가 아니라, 1인분이지만 국자 째 담아주던 마음인지도 모른다. 빈틈없는 교환 경제 속에서, 음식에 들어 있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숫자로 배를 채우는 동안 그리운 장면들은 자주 거품처럼 떠올랐다가 퐁 하고 터졌다. 국물 속에 보일듯 말듯 숨어 있는 떡볶이를 찾다가 문득,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지금의 거리, 태평양을 건너야 갈 수 있는 한국과 이곳의 거리 중 어느 것이 더 멀리 있는지 가늠만 하다 아득해져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언제 한 번 날 잡아 떡볶이를 푸짐하게 만드는 수밖에. 그래야 풀린다. 머뭇거리던 국자가 담은 공허한 배부름이. 괜히 소심하게 떡을 세다가 얹혀버린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