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 Jul 28. 2024

이웃집이 우리 집 우체통에 넣어둔 것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는 총 3층으로 한 층마다 각각의 코너, 4세대씩 있다. 같은 층 뒷집에는 우리 집 아이들보다 두 살씩 어린, 성별도 같고, 남매의 나이 터울도 비슷한 아이들이 살고 있다.


아이들이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사용하던 목재 울타리가 더 이상 필요 없어 차고 창고에 넣어두었는데, 이웃집 여자가 그걸 봤나 보다. 어느 날 길에서 마주쳤는데 혹시 본인들이 그 울타리를 쓸 수 있는지 물어보아, 선뜻 그러라고 씻어서 주겠다니 얼마를 주면 되는지 물었다.


어차피 창고에 있던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쓰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반가워 그냥 잘 쓰고 또 다른 필요한 사람을 알면 전해주라고 마무리를 지은 후 까맣게 잊고 있었다.


1여 년 정도 지났을까. 둘째 어린이 집 픽업하러 간 남편이 이웃집 남편을 만났는데 (그 집 첫째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닌다), 부인이 그 목재 울타리를 중고 장터에서 팔아 그 돈을 우리 집 우체통에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우체통을 확인하니 광고지, 아파트 관리비 같은 건조한 종이들 틈에 귀여운 카드가 있었다. 카드에는 한국어를 찾아보았는지 "감사합니다"라는 글자도 쓰여 있었고, 무려 70불이라는 지폐가 들어있었다.



한국의 당근마켓처럼 중고품을 사고파는 플랫폼으로 페이스북을 많이 사용한다던데 거기서 판 모양이었다.


페이스북에 계정이 없지만 중고마켓 커뮤니티 같은 데는 유용할 수 있으니 가입해야지 하면서도 귀찮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며 게으르게 창고에나 박아두었던 물건이 현금으로 돌아와 수중에 쥐어졌다. 이웃집 여자는 당신을 위해 사고 싶은 거 사세요 호호하는데 뭔가 뜻깊게 쓰고 싶었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 먹을래요?


평소 그렇게나 개인주의적인 인간이었으면서. 갑자기 [뜻깊게 돈을 쓴다]라는 의미가 어떻게 [함께 저녁을 한다]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이 작은 집에 누굴 부르겠느냐는 마음도 무찌르고, 용기를 내어 이웃집 여자에게 초대 문자를 보냈다.


너무 좋죠!


심장이 간질거렸다. 누군가에게 선뜻 저녁 식사 초대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 이렇게 설렐 일인가.


금요일에 소고기 1kg을 사 와 레시피를 따라 만든 불고기 양념에 재워두고, 불고기에 함께 넣을 양파, 당근, 송이버섯, 쌈무는 기본, 특히 이곳 한인 식당에서 고기를 먹을 때 추가하면 추가금이 철컹철컹 붙는 상추, 깻잎을 푸짐하게 준비했다. 호불호가 없는 부추전도 할 생각이었는데 웬일인지 근처 한인 슈퍼마켓의 부추가 시들시들해 아시아 슈퍼마켓을 돌며 싱싱한 부추를 한 움큼 샀다.


아이들을 위한 계란말이도 따로 준비하고,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도 구웠다. 이제 막 딸기가 마트에서 보이기 시작해, 바닐라 케이크에 아이싱과 곁들여 딸기와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토요일 저녁,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린다.


똑똑똑.

너무 멀리서 왔어요 하하하


그러고 보니 열 발자국 남짓한 거리에 살면서도 지난 5년여 동안 왕래가 없었다. 가깝지만 먼 길이었던 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작은 집이지만 북적북적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이야기하고 2살부터 6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자기들 방과 발코니를 오가며 올망졸망 고맙게도 잘 놀아주었다.


무엇보다 집에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좋았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생각하던 것 치고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맛있게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포근했고 정겨웠다.



이웃이 우체통에 넣어둔 선물 덕분에, 모처럼 왁자지껄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좀 느슨하게 집안 문턱을 낮추며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가족도 친척도 없이 둘이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누군가와 끈끈한 관계를 맺는 일이 어쩐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딱히 우리 부부가 친구를 잘 사귀는 타입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민 생활동안 타인에게, 한국인에게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연을 쉽게 끊는 쪽에 서 있었던 건 아닌지. 타인에게 [배려]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오히려 [경계]를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가 한 순간 어느 한쪽에서든 선을 넘게 되는 상황을 미리 피하고 싶었다.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 같은 건 애초에 실마리조차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같은 거 말이다.


그렇게 칼같이 잘라 생각하고 살면서, 선심이든 상처든 주지도 받지도 말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딱히 교류라고 할 만할 일 없이 사는 일이 정신적 평화로움에도 좋았고, 그래서 편리했다. 누군가의 생색을 들을 필요도, 갚아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 따위도 없이 나만의 세계에서, 마음 속 계산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남편과 아이들로도 인생은 충만했으니까.


이제 와 이곳에서 타인과의 끈끈한 관계는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각자의 삶이 바쁠텐데,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교류하지 않는다는 편리함'에 길들여진 시간을 깨어나가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차 한잔 할 정도의 시간. 저녁 한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초대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삶을 풍요로이 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사람이 무섭다고 하기에는 이제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리기도 했고 말이다. 좀 느슨하게 살자. 얼른 페이스북 중고장터 가입도 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