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 Apr 21. 2024

파블로바를 굽던 날

남편과 나는 결혼 전 함께 살았다. 이제 막 베이킹에 재미를 들인 내게 당시 남자 친구던 그는 퇴근길에 베이킹 책을 선물이라며 들고 오거나, 초보의 실력으로 만든 쿠키나 케이크를 맛있게 먹어주었다.


하루는 파블로바를 만들어보고 싶어 인터넷에서 본 레시피대로 계란을 과감하게 5개를 한꺼번에 사용했다. 그런데 웬걸! 망쳐버렸다.


아 망쳐버렸네 하고 훌훌 털어내기가 어려웠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어릴 적 엄마에게 끓여준 라면이 꼬들하다며 한 젓가락을 먹고는 크게 혼난 적이 있다. 한마디만 듣고 사그라들 줄 알았던 엄마의 화는 뱃속에서 불어나는 라면처럼 불어나더니 어느새 윽박을 질러댔다. 이걸 누구 처먹으라고 끓였냐, 이걸 라면이라고 끓였냐. 서스름 없이 뱉어지는 문장에 심장이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들어, 차라리 그 자리에서 그렇게 라면 국물에 녹아 없어져버리고 싶던 순간.


왜 그 순간이 떠올랐을까. 혹시나 계란을 5개나 썼는데 먹지도 못하는 걸 만들어서 화를 내지는 않을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시도하고 망쳤다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온갖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부엌에서 망친 파블로바를 바라보는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꼬들한 라면을 끓였을 때처럼 이 사람도 나를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릴까 봐 불안해하며.


이내 마주한 그의 얼굴.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머금고 돌아선 그는 혹시 중간에 체크한다고 오븐을 열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다고 하니 원래 파블로바가 처음 만들 때 tricky 할 수 있다고 했다. 중간에 오븐을 열면 파블로바가 가라앉는다고 찬찬히 설명해 주고는 외할머니가 만드는 법을 잘 아시니 한 번 여쭤보자고 한다.


이런 일로 지금 전화를 해도 되는 걸까? 생각은 했지만 이미 전화벨은 울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의 외할머니도 재미있다는 듯 웃으시며 레시피와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셨다. 퇴근 후 피곤할 법도 한데, 남편은 이번에 같이 만들어 보자고 했다. 연습 삼아해 보는 것이니 일단 계란 3개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날 밤,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오븐을 돌렸다. 머랭을 만드는 건 오래 걸리지 않지만, 오븐에 넣고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븐에 넣어 두기만 하면 되는 세상 쉬운 디저트인데 처음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해준 것도 고맙고,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외할머니께 레시피를 전수받아주어 고마웠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남기신 특별한 레시피가 되었으니까.


파블로바는 달콤했고,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나는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류마티스가 있던 나를 그와 그의 가족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삐걱거리는 몸으로 정신마저 함께 흔들리던 어두운 시간 동안, 주말마다 나를 산으로 바다로 데리고 다니며 바깥바람을 쐬고 온 날이면 너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말해주었다.


결혼 후 함께 살면서는 여느 집처럼 지지고 볶는다. 크게 싸우던 날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혹은 조금 특별한 기분을 내고 싶은 날이면, 파블로바를 굽는다. 평소에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나마 당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나만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때마다 매번 오늘의 파블로바가 여태껏 중 최고라며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과, 이제는 아이 둘까지 접시를 싹싹 긁으며 맛나게 모습을 볼 때마다, 깜깜해진 창밖 풍경을 뒤로하고 안도하던 그날 밤이 떠오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