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 Apr 14. 2024

그렇게 아프면 한국에 돌아가면 되잖아?

그런 삶도 있는 거지

뉴질랜드에서 아플 때는 보통 GP(General Practioner)를 찾는다. 그것도 사실 정말 아파서 몸이 어디 이상한 거 아니야 싶을 때 병원을 찾지, 열나고 몸살기운 있는 것 정도로는 병원에서도 딱히 해주는 것이 없어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타이레놀 같은 해열제를 먹으며 병이 지나가도록 기다린다.


류마티스 진단을 받았으니 Rheumatologist, 즉 스페셜리스트에게 가라는 리퍼럴을 GP가 작성해 준다. 스페셜리스트에게 갈 때부터 상담비용부터 시작해, 병원비는 어마어마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자면, 한 번은 저녁에 배가 너무 아파 끙끙 대다가 응급실에 갔는데, 신장 결석이라고 했다. 프렌즈에서 조이가 'Kidney Stone!' 하며 아파하는 장면에서 저게 그렇게 아픈가 하며 넘겼는데. 조이의 고통을 그제야 오롯이 이해하던 순간이었다.


며칠 후 스페셜리스트와 수술 일정을 잡고, 마지막 첵업까지 나온 비용은 대량 만불 정도. 다행히 학생 비자로 오면서 함께 곁들여 신청했던 보험사에서 커버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험들길 정말 잘한 때였다.



스페셜리스트를 보아야 하는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일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나와 무관한 일일 것이라 여기던 중 류마티스가 찾아왔다. 신장 결석처럼 수술하면 딱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지켜봐야 하는 병이라고 한다. 정기적으로 스페셜리스트를 방문하고, 약을 복용하고, 경과를 지켜보고.


몸을 생각하면 병원을 가는 것이 맞았으나, 가지 못했다. 아직 자리도 못 잡았는데, 스페셜리스트를 보러 다닌다고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한다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시티 안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신장결석 때도 스페셜리스트를 찾아가는 교통이 너무 불편한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 같아 아예 리퍼럴 받은 걸 사용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류마티스는 초기가 중요하다. 당장 한국을 갔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도망치듯 한국을 나와 나이만 먹고, 류마티스라는 병까지 얻어 다시 한국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대학교 3학년 휴학 후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대기업 인턴을 하기 전까지는 존재 자체가 꼴 보기 싫다는 듯한 멸시를 반찬 삼아 눈칫밥을 먹었다. 이렇게 돌아갔다가는 인간 취급도 못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삶이 너무 심각하고 진지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삶 속에 함몰되어 이거 아니면 온 세상이 무너진다고 잔뜩 겁을 먹고살았다.


천성이 예민하여 자주 두려웠던 것이었을 수도 있으나, 대체로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싸우고, 이겨내는 상대였다.


시험을 잘 못보면 세상이 끝날 것 처럼 낙심했고, 그럴때면 패배자라고 스스로 딱지를 쉽게 붙였다. 공부하고, 대학 가고, 자격증 따고, 인턴 하고. 로드맵처럼, 남들 하는만큼 열심히 살다보면 당시 사회적 성공이라 믿었던 취직 또한 따라오는 거라 믿었다. 얕고 편협한 방식으로 경쟁 사회에 길들여진 마인드였다.


급기야 인턴 후 취업에 보기 좋게 실패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참 고소했을 수도 있고, 괜한 안도감이 들었던 결과일 수 있다고 믿었다. 개인의 불행은 입에서 입으로 쉽게 도마 위에 올려진 채 다져지거나, 한낱 가십거리로 소비될 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거나,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 같은 것은 없다고 단정지은 채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물론 삶을 거창하게 생각하면서 시작된 오류였다. 자존감이 낮았다고 생각했으나 돌아보면 자의식 과잉으로부터 온 타인에 대한 실망이나 관계의 공허함이었고, 실패를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깟 취직 못한 것쯤이야, 세상은 넓고 기회는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겨울이라는) 그 해 날씨 탓도 해보지만, 몸이 힘들어지니 정신도 온전치 못했다. 류마티스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면서 익숙한 우울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도 모르는 어둠이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을 것이라 다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갔어도, 나는 아팠을 것이다.











이전 02화 이민을 갔는데 류마티스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