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색다른 절망이 낫겠어
류마티스 관절염을 진단받은 곳은 한국이 아닌, 뉴질랜드였다. 당시 호텔에서 바리스타를 할 때였는데, 호텔 창가 코너에서 안팎으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중 오전 6시에 문을 열고 오후 2시 반이면 문을 닫는 곳으로 혼자 바리스타는 물론이고 서빙과 정산까지 담당했다.
호텔로 이직하기 전에는 카페에서 매니저를 했다. 대학교 때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퍼스 콘서트홀 앞 카페에서 했는데, 영어도 잘 못하던 나를 기꺼이 고용하여 이끌어주던 매니저들의 리더십에 반해 저들처럼 외국에서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며 매장을 관리하고 직원을 아우르는 멋진 매니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낭만에 불과한 꿈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해치워야 할 취업 준비는 치열했다. '안타깝지만'이 담긴 거절의 메시지를 밑도 끝도 없이 소화해 내며, 어느새 간절한 꿈은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취직만 하면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대학 졸업반의 팽팽한 공기 속에서, 취업을 하지 못한 이들의 삶은 쉽게 무의미해졌다. 적어도 내 삶은 그랬다.
도망쳤다. 도망치는 일이 제일 쉬워서 한 선택이었다. 국비 지원으로 간 뉴질랜드에서 마침내 첫 바리스타 면접 때, 한 때 낭만이었다던 꿈을 여기서 실현해 보리라 다짐하고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중에 꼭 이 지점의 매니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쩌면 삶은 한 때 꾸었던 꿈들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몇 개월 뼈가 으스러지게 일했더니 정말로 매니저로 승진을 시켜주었는데, 이후 오너의 갑질은 점점 심해졌다. 이전 호주에서 일하던 카페는 스타벅스처럼 본사에서 관리를 하고 매니저가 지점장과 같은 역할이었다면, 이곳은 오너가 프랜차이즈 라이센스를 사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같은 [매니저]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었으나 역할이 달랐다. 오너는 쉽게 화를 냈고, 기분을 관리하지 못했다. 한 번은 손님에게도 소리를 질러 중간에서 중재를 해야 했었다. 뉴질랜드에서 우리나라 축구만큼 열광하는 럭비 월드컵 기간에는 새벽 2시, 3시까지 기한 없이 손님이 들어오는 대로 문을 열어두고는 붙잡혀 있었다.
꿈꾸던 매니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노예 계약으로 질질 끌려다니며 새벽에 파티를 하다 소란스럽게 들어오는 손님을 위해 망고 프라푸치노를 만들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팔고자 하는 오너의 집념은 곧 기약 없는 퇴근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체력도, 잠자는 시간도 다 갈아 넣으며 몇달이 될지, 몇년이 될지 알지 못한 채 밑도 끝도 없이 일한다고 생각하니 현실이 갑갑해졌다. 다른 곳을 알아봐야지. 이왕 다른 자리를 알아보는 김에 평범한 직장이라고 찾은 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학원이었다.
가족 같은 직원을 원하는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시작해 보자며 처음부터 간을 봤다. 일단 뭐라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사장은 나중에 영주권도 해주고, 연봉도 많이 오를 거라며 악마 같은 혀를 놀렸고, 그 말을 그때는 믿었다. 어수룩한 20대였다.
반전이랄 것도 없지만 분위기를 잘 띄우지 못하고, 막내처럼 싹싹하지 못해 한 달도 채 채우지 못한 채 쫓겨나듯 나왔다. 계약서를 쓰지 않았으므로, 고용주 마음이었다.
떠돌이 개처럼 돌아다니다 시작한 호텔 바리스타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똑똑하게 선택했다. 그 간 겪었던 일의 반대로만 하면 되었다.
계약서도 시작 전 야무지게 작성하고, F&B 매니저는 예전 호주 워킹홀리데이 때 일했던 카페 지점장님의 에너지를 닮아있었다. 그때처럼 호텔에는 외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여기서 자리를 잡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지내던 차,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려는데 이상했다. 손가락이 경직되어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좀 부은 것도 같았다.
단지 전날 무거운 걸 많이 들고 옮겨서 뻐근한 것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