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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Apr 27. 2024

서른에 적성 찾기

류마티스 덕분에 다시

류마티스 진단을 받은 이상 신체적 노동 강도가 높은 바리스타로 계속 일할 수는 없었다. 외국에서 한가로이 책이나 읽으며 커피를 내리는 우아한 카페 주인은 상상 속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직접 겪어보고서야 뼈저리게 느낀 후였다.


전공과 무관해도 좋으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 되도록이면 그저 평범한 오피스잡이 필요했다. 리셉셔니스트부터 학교 행정실 직원 등등 방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력서를 뭐라도 하나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수십 군데 보냈다.  리가 없었다.


한국에서의 학위는 무용했고, 그렇다고 한국 회사에 지원하자니 데인 일이 많아 철저히 배제했다. 이 나라에서 인정받는 대학교 학위를 받으면 구직활동에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머뭇거릴 일은 없었다. 다만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것이 적성에 맞는지, 과목을 정하는 일이 어려웠다. 취업에 유리할까 싶어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으나, 취업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무턱대고 아무거나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꾹꾹 눌러 담아 꿈꿔왔던, 진짜 유학이 아니던가. 정부 지원금을 받고 다녔던 직업학교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 이런 기회를 마련하는 순간이 오다니 신기함과 동시에, 그동안 바리스타로 일하느라 흘려보낸 시간도 있으니 허투루 아무 과목이나 결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전공과목들을 둘러보고, 고민했다. 관심 있는 과목의 교수님을 찾아 직접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고 찾아갔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과목은 번역과 교수님으로, 한국인이셨다. 상담 차 번역과의 교육 과정이나 앞으로의 진로 등에 대해 직접 듣고 싶어 찾아간 건데, 교수님은 선뜻,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 학생들이 방학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한 번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혜성처럼 내 앞에 뚝 떨어졌다. 대여섯 명의 한국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일이었는데, 생전 번역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꼽사리처럼 끼었지만 누구 하나 텃세 부리는 일 없이 친절했다.


그 팀에는 번역일을 전문으로 해오신 선생님도 계셨다. 아직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니, 본인 회사에서 나오는 번역 일을 해 볼 생각이 있는지, 한 번 경험 삼아해 보라고 업무를 주시기도 했다. 심지어 정말 프리랜서처럼 인보이스를 작성하는 것도 알려주셔 페이도 받았다. 생초보자가 해놓은 일이라 본인이 직접 다시 고쳐야 할 일이 대부분이었을 텐데도, 한 번 하고 끝날 것 같던 일을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일을 주셨다.


이민 후 늘 내가 처한 상황의 약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치여 이미 많이 지쳐 있었었다. 이기적인 인간의 민낯만을 일부러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스스로를 보호했다. 사람에 대한 경계만 키워가며 스스로도 참 별로인 사람이라 생각하던 때. 생각지도 못한 값진 경험을 대가 없이 베풀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직접 해보는 번역 일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감사하게도 번역일을 받아 꼬박꼬박 해보았지만 그저 언어만 옮겨서 바꾸는 작업이 아니었다.


어휘, 맞춤법, 문법, 문장의 흐름, 번역하는 작업에 대한 지식 등이 필요한 면밀한 작업인데, 일을 해볼수록 어려웠고, 문장을 고치느라 반복해 읽는 일이 지루했다. 원하던 대로 류마티스 증상이 있어도 할 수 있는, 앉아서,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적성이 아닌 것 같았다.


곧 서른인데, 아직 적성이 뭔지 모르는 모지리에게 선뜻 기회를 주시고, 손 내밀어 주신 감사한 분들과 안타깝지만 인사를 해야 했다.




지금도 문득, 당시의 기억을 적어 내려가는 동안, 그분들께 너무 감사하다. 사는 일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일인 듯 암담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은 그렇게 천사 같은 사람들을 곁으로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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