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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Apr 08. 2024

이민을 갔는데 류마티스라니

호텔에는 새벽같이 나가 출근시간 주변 오피스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한가해지려 치면 여기저기 닦았다. 매니저라는 이름을 달고 노예처럼 일하던 이전 카페에서 창문이든 야외용 테이블 기둥이든 다 닦던 걸 호텔에서도 당연한 듯했다. 그걸 본 F&B 매니저는 높았던 호텔 천장만큼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시되어 있는 조형물을 닦아달라고 했다.


가끔씩 레스토랑 쪽이 바쁘면 메뉴 나르는 걸 도와주기도 했는데, 접시가 꽤 크고 무거웠다. 그래도 왼손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접시 하나를 끼고, 손목에 또 하나 얹어 두 접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 후, 오른손에 하나를 들어 세 가지 메뉴를 한 번에 나르곤 했다. 프로페셔널한 웨이트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조식 뷔페가 끝나고 나면, 레스토랑 쪽 직원들이 치울 때 나도 함께 합류했는데, 직원들도 다 또래여서 함께 키득거리며 정리를 하고, 호텔에서 제공해 주는 점심을 둘러앉아 먹었다. 잠시지만 이런 짧은 농담 같은 시간 덕에 호텔일이 견딜만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후 3시쯤 마무리하면 대낮인데도 녹초가 된 몸으로 집에 왔다. 막상 일할 때는 몸이 고되다는 생각을 못하고는 꼭 집에 와서 쓰러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움직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이 누르고 있는 불안에 대한 대가를 치러내던 시간이었다.


대학도 졸업하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떠난 곳이 아니었던가. 가끔 또래 나이의 직원, 호텔 수트를 입고 사무실에서 호텔리어의 업무를 보는 직원이 행사가 있을 때는 카페에 내려와 함께 있곤 했는데, 그들의 삶이 우아해 보일 때면 언제 저들처럼 버젓한 사회 구성원이 되어 볼 수 있기는 할까. 오래도록 묻어둔 보통의 삶에 대한 갈망을 마음속에서 조물 거리다가 조용히 내려 두곤 했다.


[홍정욱의 7막 7장], [나는 런던으로 출근한다]와 같은 책 덕분에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겨우 정부 지원금을 받아 직업학교를 들어간 아시아인이었다. 그렇다고 그리 실망스러운 현실이라 생각지도 않았다. 꿈은 꿀 수 있을 때 많이 꾸어두고, 현실은 현실대로 처치하며 살아가면 되었다.


호텔에서 커피를 만드는 일이 아무리 즐거운 들, 20대 초반 알바처럼 해볼 일이지 평생 커피만 만들 수는 없었다. 내 자리인 듯 아닌 듯,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아갈 여유도 없이 타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치열한 눈치싸움이었다.


그날도 여느 새벽처럼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려는데 손가락이 굽혀지질 않았다. 아침마다 경직되던 손가락이 점점 붓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은 별로 부어 보이지는 않는다며, 난데없이 본인의 손가락을 펴 보이셨다. 본인 손가락이 더 부은 것 같다고.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말라고만 하고는 나를 되돌려 보냈다. 차라리 정말 선생님 손이 더 부은 게 맞아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었다면 참 좋았을 뻔했다.


며칠이 지나니 출근 준비가 불편할 정도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처음 발을 바닥에 놓는 순간부터, 발의 통증이 심해 발바닥으로 제대로 딛지 못하고 절뚝거렸다. 손가락의 경직도는 심해져 요상한 모습으로 칫솔을 잡고 양치를 했고,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하여 겨우 옷을 갈아입었다. 쇄골 부위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통증으로 팔을 움직이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계속해서 일을 나갔는데, 서빙이며 청소며 움직이는 동안,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발 밑 어딘가에서 오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우유를 스팀 하는 저그를 제대로 잡지 못해 칫솔질할 때처럼 이상한 꼴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찾은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였다. 며칠이 지나 결과를 들은 날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 '류마티스'가 허락도 없이 내 인생에 성큼 들어온 날이 되었다.


증상은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자기 전마다 뻣뻣한 손과 가시로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맞이해야 할 아침이 무서웠다. 이민 생활을 하며 마음속에 쌓아온 원망, 불신, 미움같은 것들이 갈 곳을 잃은 채 온통 바짝 돋은 가시가 되어 이제와 나를 찔어대는 것 같았다.


때마침 뉴질랜드에도 겨울이 내렸다. 어둑한 새벽에 출근 준비하며 삼키는 스테로이드제가 딱 하루치의 고통을 견디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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