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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그 여름의 기억

by 빛날 Feb 27. 2022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배고픔에 냉장고를 뒤졌지만,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끓인 라면.

 식탁에 세팅을 하고 먹으려는 찰나 쓱 갑작스레 낯선 젓가락이 내 면발을 가져가 호로록  삼킵니다.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화가 단전에서부터 올라 한 음절의 고성이 실내 공기를 가릅니다.

"야~~~~~~~~~"


 작은 내 물건, 먹거리 하나라도 뺏기면 화가 납니다.

하물며 나라를 잃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터를 이루고 살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할까요?

라면은 5분 안에 다시 끓일 수 있지만, 나라는 뚝딱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김구, 이회영,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경외심을 갖습니다.


 그 시대에 살았다면 저는 독립운동을 했을까요? 국외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국내에서 일어난 3.1 만세 운동이라도 했을까요? 군중의 끝에서라도 태극기를 양팔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라고 당당히 외쳤을까요? 분위기에 용기를 내어 만세운동을 하다가 총소리가 울려 퍼지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슬그머니 태극기를 내려놓고 내뺐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위협하는데 나라의 독립운동에 동참했을까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 시대에 저는 독립운동을 했을 거라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독립 운동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말한지는 오래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독서 토론 수업을 하면서 우리 역사 수업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 한국사를 공부하게 된 겁니다. 공부를 하면서 한국사 1급 시험을 겸사겸사 보기로 했습니다. 참 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실기시험도 없이 이론 공부만 하면 되니까요. 벌써 6년 전 일입니다. (1급 시험 너무 만만하게 보지 마시기를....) 역사를 공부할 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된다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대한민국이 정말 대단한 나라임을 느낍니다. 1인칭 시점에서 2,3인칭 시점으로 관찰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제일 크게 와닿았던 시기는 아무래도 근대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일제 식민지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사고(思考) 하니 제일 크게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독립운동가를 '훌륭하신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분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니 내가 그분의 자녀였고 엄마였으며 아빠였고 친척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 독립운동하신 분들에게 한 끼의 밥을 대접한 동네 사람도, 여비라도 보태신 분들도 목숨을 내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다시 울컥해집니다. 자격증을 따고 역사에 대한 수업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역사적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가더라도 역사에 관련된 장소가 있으면 잠시라도 들렀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지역 해설사님의 해설을 듣고 옵니다.


 서대문 형무소를 처음으로 찾은 건 6년 전입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때 여행을 가보고 싶은 곳을 물으니 '서울'이라 답합니다.

유럽도 미국도 아니고 가까운 동남아 휴양지도 아닙니다. 참 소박합니다.

 지방에 있다 보니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대도시를 느껴보고 싶었는 것 같습니다.

가족 모두 여행을 가기도 하지만 가끔 같은 성별끼리, 혹은 다른 성별끼리 데이트를 했던 때인데 서울 일정은 첫째 딸과 2박 3일 일정으로 갔습니다. 그 여행 코스 중에 서대문 형무소를 넣었습니다.


 여행 일정.. 혹시 궁금하신가요?

경복궁, 종로, 인사동, 청계천, 서울 야간 시티투어버스로 다녀온 남산, 광화문, 교보문고 본점, 서대문 형무소.... 여행 책임자의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제가 가 본 곳을 제외하고 장소를 정하다 보니..)

초등학생 5학년 여자 아이에게....... 너무....... 했나요?

여행은 동행자에 따라 행복지수가 달라지니까요.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하하하하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울에 친구가 있어 일주일 정도 서울과 수도권 주변 여행을 좀 다니긴 했습니다. 그때는 놀이와 체험 중심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서울의 첫 이미지는 크고 화려함이었을 텐데요.

조금 성장한 초등 고학년으로의 여행은 전통문화 여행이 되었습니다. 숙소는 인사동이었고 숙소 바로 앞이 식당가, 쇼핑가가 있어서 편하게 먹고 볼거리가 많아 좋았습니다. 뉴스에서 보던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광화문과 청와대를 보면서 딸아이와 신나게 걸어 다녔습니다. 한 여름이었지만 무모하게 걸었습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실컷 웃고 즐기다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들어서면서 우리는 엄숙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장소가 주는 기운이었겠지요.


 옥사 안 너무나 좁은 공간, 강제 노역과 인권 유린, 목숨만 겨우 연명할만한 형편없이 부실한 식사,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아무런 보호가 되지 못하는 너무나 춥고 차디찬 감옥. 때론 너무나 뜨겁고 습한 숨 막히는 공간. 몸이라도 똑바로 누울 수 있었을까 의심되는 좁은 그곳은 바로 자신의 나라안에 있는 땅입니다.


 내 나라의 땅인데 남의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감시하고 고문하는 거꾸로 된 상황이 일어났던 공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했지만 당연하게 얻지 못한 자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피를 흘려야 했던 상황에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인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어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야 했던 그 고통이 느껴져 또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고문에 고문을 당하고도 숨 막히는 공간에서도 만세 운동을 다시 했던, 어린 소녀이지만 결코 어린 소녀가 아니었던 유관순의 만세 소리가 들립니다.

"너 죽을 수도 있다."

"너 때문에 우리가 더 고통받으니 닥쳐!"라 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함께 했던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우렁찬 만세 소리가 들립니다.


"대한 독립 만세!"


옥사를 나오니 8월의 뜨거운 태양이 몸에 꽂힙니다. 수감된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그 태양 아래 이 운동장을 지나갔겠지요. 뜨거움을 피하고 싶었겠지요. 어쩌면 햇볕을 누려서 감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형장을 지나갑니다. 똑 울컥합니다. 눈을 감고 고개 숙여 묵념을 합니다.

고문과 구타로 흔적이 가득한 시신을 외부에 몰래 옮기는 통로 '시구문' 앞에 있습니다. 어금니 꽉 깨물고 크게 눈뜨고 먹먹한 마음으로 한참을 서 있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크게 호흡을 하고 돌아섭니다.

 수감되셨던 분들의 사진 속 얼굴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갑니다. 결의에 찬 눈빛과 당당한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를 되뇌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 나옵니다.


 2년 후 둘째를 데리고 첫째와 함께 다시 8월 서대문 형무소를 왔습니다.

이번에는 첫째 아이가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동생에게 먼저 이런저런 설명을 해 줍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103년이 지났습니다. 전쟁도 겪었습니다. 민주화에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국가적 경제위기도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2022년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가 없었습니다. 전쟁과 민주화 운동에도 남녀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국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부디 정치를 하시는 분들이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일을 경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징비록을 쓰신 류성룡과 같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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