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레바논에 도착하는 순간, 중동지역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은 가차 없이 깨진다. 여성들의 자유로운 옷차림, 레바논산 맥주며 와인이며 아락(arak) 같은 다양한 알코올음료, 푸른 지중해를 끼고 펼쳐진 눈부신 해변, 3천 미터가 넘는 산과 스키장 그리고 오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여러 유적지 등은 우리에게 매일마다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독특한 풍광으로 둘러싸인 카디샤 밸리에서는 설렘이 유독 더했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여행지에서 매일 설레며 잠에서 깨어보기도 오랜만이다.
아침식사를 마칠 무렵 다니(Dany)가 도착했다. 다니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길안내를 해주기로 한 친구다. 일정을 조금 조정해서 점심 무렵 우리를 특별한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호기심이 한 뼘 더 자라났다. 다니는 어제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서프라이즈를 안겨 주었다. 수도원을 보러 가는 길에 시원한 계곡에서 미니 피크닉을 마련해 주었는데 집에서 끓인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와 우리에게 일일이 따라 주었다. 높은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은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 더위를 식히기 좋았고, 진하게 로스팅된 아랍식 커피는 우리 취향에 딱 맞았다. 수도원에서 따준 포도는 또 얼마나 맛나던지.
다니의 고향인 브샤레 시내를 지나 언덕에 위치한 과수원에 들렀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곳이라고 했다. 아직 시기가 일러 사과는 덜 여물었지만 그중에 먹을만한 걸 몇 개 골라 따주었다. 아오리 사과 같이 풋풋했다. 한 입 베어 무니 새콤한 맛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한 달만 지나면 빨갛게 익은 사과를 수확하여 베이루트로 보낸다고 한다. 워낙 맛이 좋아 판로가 좋다는 카디샤 밸리 사과. 상큼한 사과향에 취한 우리는 행복해하며 다니가 말한 특별한 곳이 아버지의 과수원인 줄 알았다.
사과 한두 개씩을 손에 쥔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신의 백향목 숲을 지나 레바논 산맥을 오르는 길이었다. 지금은 한적하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중동지역이라 덥기만 한 줄 알았는데 눈이 내린다니 신기했다. 가만히 멈춘 채로 겨울 손님을 기다리는 스키 리프트가 멀리 보였다.
레바논은 남한의 1/10 크기이다. 이 작디작은 나라에 두 개의 커다란 산맥이 자리하고 있다. 레바논 산맥과 안티 레바논 산맥의 높이는 평균 2천5백 미터에 달한다. 서쪽에 위치한 레바논 산맥은 지중해와 평행으로 놓여 있으며 남북으로 160km가량 길게 펼쳐져 있다. 레바논 산맥을 흔히 레바논 산이라고 부른다. ’ 레바논 산(Mount Lebanon)’의 어원은 고대 셈 어인 ‘laban’에서 왔으며 “희다(white)”라는 뜻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2m에서 최고 4m까지 눈이 내린다고 하니 ‘흰 눈이 쌓인 산’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하다. ‘레바논’이라는 국명도 레바논 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발 3천 미터 가까이 오르니 나무는 자라지 않는지 산은 민둥산처럼 헐벗은 채 중간중간 덤불만 있었다. 오르막의 정상에서 왼쪽 길로 좀 더 가면 레바논 산의 최고봉 쿠르나 아사다가 있다. 쿠르나 아사다의 높이는 3,088m이다. 쉽게 외워지지 않는 이름이지만 뜻이 흥미롭다. ‘쿠르나 아사다(Qurnat as Sawdā’)’는 아랍어로 ‘검은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계속해서 부는 바람으로 눈이 쌓이지 않는 산봉우리는 산 아래로 펼쳐진 하얀 눈 속에서 검게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여름에 방문한 우리에게 눈 내린 레바논 산의 풍경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엽서에서 봤지만 폭설로 덮인 백향목과 그 뒤로 우뚝 서있는 하얀 레바논 산은 황홀했다.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에 온다면 꼭 겨울에 오리라. 무릎 위, 아니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폭설에 갇혀 며칠간 머물고 말리라.
쿠르나 아사다로 이어지는 곳을 지나니 반대 방향으로는 베카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안티 레바논 산맥 너머는 시리아 땅이다. 평화로웠던 시절에는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지만 내전으로 몸살을 앓는 시리아와의 국경은 현재 차단되어 있다고 한다. 하루빨리 시리아에 평화가 오기를 바라며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지그재그로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우리는 올라온 만큼 한없이 내려가야 했다. 커다란 나무 하나 없이 척박해 보이는 주변의 땅은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메마른 사막과 다를 바 없었다. 덤불 사이로 양과 염소를 치는 목동의 모습만 간간이 보였다. 근처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걸까. 가축들에게 물은 어떻게 먹일까. 초록이 드문 풍경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게는 아름답게 보였다. 왜였을까.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많이 보낸 탓에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고, 우리는 배가 몹시 고팠다. 분명히 맛난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 제대로 된 집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 뱃속에서 요동치는 꼬르륵 소리라도 들은 걸까. 다니는 걱정 말라며 거의 다 왔다고 했다. 이런 곳에 식당이 어디 있다는 걸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니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찌푸리고 보니 저 멀리 사막 중앙에 푸른 점이 조그맣게 보였다. 눈을 깜빡이며 자세히 보니 푸른 나무 사이로 물웅덩이가 보이는 듯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였다. 차창 밖으로 어른거렸다가 커브를 틀 때마다 시야에서 사라져서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아시스는 신기루가 아니라 실화였다. 레바논 산에서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린 물은 샘물처럼 모여 물웅덩이를 이루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의 나무와 산을 그대로 담아 비추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있는데도 물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찬 물로 손과 얼굴을 닦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꿈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아시스는 마치 호수 같이 넓었고 주변으로 식당과 캠핑장이 모여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ATV 같은 액티비티와 캠핑을 즐기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배가 무지 고팠던 우리는 레바논식 한상차림을 주문하고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아시스 주변으로 서 있는 미루나무와 노간주나무는 더욱 푸르른 듯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오아시스라 마냥 신기했고 묘한 흥분감마저 일었다.
음식이 하나씩 나오자 우리는 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음식 하나하나 나무랄 데 없이 맛났고, 속에 야채와 허브를 넣어 구운 송어요리는 아주 특별했다. 서빙을 해 주는 직원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생선구이를 맛보게 될 거라고.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그 말이 절대로 과장이 아님을 실감했다. 지금껏 먹어본 어떤 생선구이도 비교불가였다. 꿀을 얹은 치즈 디저트까지 완벽한 점심식사였다.
높은 산 아래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는 건 신비한 일이다. 맑고 풍요로운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따스한 햇살과 서늘한 바람 속에서 보낸 하루는 축복이었다. 레바논에서 다니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오늘은 그가 우리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우리는 출발했고, 산 정상에 도착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서프라이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발아래 구름이 바다처럼 펼쳐져 넘실거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구름은 장관이었다. 카디샤 밸리의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향연이었다. 구름 사이사이로 보이는 브샤레 마을은 몽환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 카메라에 결코 담을 수 없는 풍경은 내 가슴에 오롯이 새겨졌다.
산을 다 내려오니 시내는 안개에 싸여 또 다른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카디샤 밸리에서의 하루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버라이어티 하다. 다니에게 오늘 다녀온 곳의 이름을 물었다. 아윤 오르고쉬(Ouyoun Orghosh). ‘아윤(Ouyoun)’은 아랍어로 ‘샘’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굳이 이름을 적어온 이유는 당신 때문이다. 당신에게만은 알려주고 싶다.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나의 오아시스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