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다.
미르가 꿈에 찾아온 뒤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전히 미르가 보고 싶었지만, 예전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미르가 행복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났다.
라파엘 수리점.
성북동 골목 끝에 있던 그 허름한 가게.
깨진 망원경을 고쳐준 은발의 남자.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하지 못했다.
돈도 안 받고 망원경을 고쳐줬는데, 커피 한 잔 사드리겠다는 약속만 하고 돌아왔다.
그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주문했다.
그가 좋아한다고 했던 그 원두.
이틀 뒤 택배가 도착했다.
고급스러운 포장에 담긴 원두 한 봉지.
향을 맡아보니 과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나는 원두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성북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그 가게를 찾아갔던 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골목.
칠이 벗겨진 파란 대문 집 옆,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샛길.
그 끝에 있던 시간이 멈춘 듯한 목조 건물.
버스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랐다.
지난번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때는 망원경을 메고 헐떡거리며 올랐는데,
오늘은 원두 한 봉지뿐이니까.
파란 대문 집이 보였다.
나는 그 옆 샛길로 들어섰다.
좁은 틈새.
건물과 건물 사이,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두운 통로.
10미터쯤 걸었을까.
뭔가 이상했다.
길이 끝났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앞에는 높은 콘크리트 담벼락만 있었다.
“어…?”
나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히 이 길이 맞았다.
파란 대문 집 옆, 좁은 샛길.
지난번에 이 길로 들어가서 작은 공터가 나왔고,
그 끝에 라파엘 수리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터도 없고, 가게도 없었다.
그냥 막다른 골목일 뿐이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나는 다시 나와서 주변을 살폈다.
파란 대문 집.
맞다, 여기다.
칠이 벗겨진 그 파란 대문.
틀림없었다.
다시 샛길로 들어가 봤다.
결과는 같았다.
막다른 골목.
콘크리트 담벼락.
나는 담벼락을 손으로 만져봤다.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의 감촉.
금이 간 곳도 없고, 문이 있던 흔적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말도 안 돼…”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
기와지붕에 잡초가 자라고, 창틀은 뒤틀려 있던 그 가게.
천장에 돋보기들이 모빌처럼 매달려 있던 그 공간.
그리고 은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
환각이었을까?
내가 미쳐서 본 헛것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망원경은 진짜로 고쳐졌다.
그 망원경으로 미르를 봤다.
고양이별을 봤다.
그게 다 환각이었을 리 없다.
나는 지친 발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파란 대문 집 앞 작은 평상에 주저앉았다.
가방에서 원두 봉지를 꺼내 멍하니 바라봤다.
전해줄 수 없는 선물.
만날 수 없는 사람.
아니, 사람이 맞기는 했을까?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하얀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었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앞으로 걸었다.
안개 사이로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은발.
하얀 셔츠에 갈색 가죽 앞치마.
긴 손가락에 끼워진 흰 면장갑.
라파엘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안갯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직접 찾아와 주셨군요.”
나는 멈춰 섰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는 만나게 해 달라며 애원 아닌 강요를 하고, 누구는 아예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라파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대는 감사 인사를 하러 직접 와 주셨군요. 원두까지 들고서.”
“가게가… 사라졌어요.”
“사라진 게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곳이니까요.”
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필요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곳.
그렇다면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망원경 덕분에 미르를 봤어요. 편지도 받았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진심이 렌즈를 닦은 겁니다.”
“무슨 말이에요?”
“그 망원경은 원래 고칠 수 없는 물건이었어요. 렌즈가 깨졌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마음에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한 건 그 틈을 막지 않은 것뿐이에요.”
나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나는 미르를 봤다.
미르의 편지를 받았다.
미르가 꿈에 찾아왔다.
그걸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라파엘이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직접 찾아와 주셨으니, 하나 더 알려드리지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슈퍼문을 기억하세요.”
“슈퍼문이요?”
라파엘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안개 사이로 거대한 보름달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크고, 훨씬 밝은 달.
“그날 밤, 하늘을 보세요.”
그게 전부였다.
라파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졌다.
그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파엘이 완전히 사라졌다.
안개만 남았다.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슈퍼문.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검색했다.
다음 슈퍼문은 2주 뒤였다.
그날 밤, 개기월식까지 겹친다고 했다.
“그날 밤, 하늘을 보라…”
나는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는 건 알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갔다.
망원경이 거기 서 있었다.
렌즈 중앙에 난 금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기다릴게.”
나는 망원경을 쓸어내렸다.
2주.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거실에서 바람이가 울었다.
밥 달라는 소리였다.
나무도 따라 울었다.
“알았어, 알았어. 밥 줄게.”
나는 베란다를 나와 거실로 향했다.
일상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날 밤이 올 때까지.
저녁이 되자, 나는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달이 떠 있었다.
2주 뒤면 저 달이 가장 크고 밝아진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원두 봉지를 꺼냈다.
전해주지 못한 선물.
나는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 커피 한 잔 대접할게요.”
혼잣말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