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으며
우리 할아버지의 서재는 언제 생각해도 참 멋들어졌다. 한 벽면을 모두 나무로 만든 거대한 책장에 수백 가지 책들이 비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갈히 쌓여있었다. 그 서재 앞에는 할아버지의 책상, 오래 앉아도 편안한 방석 하나, 옆으로 펜 가지 여러 개. 내가 그토록 신혼집 인테리어에 서재방을 고민했던 건 그런 환경 속에서 20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할아버지의 책장을 뒤지면 늘 어렵고 심오한 책들로 가득했다. 마구 뛰어놀던 철없던 시절을 지나 초등학생, 중학생, 아니 심지어 대학생이 돼서도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쉽게 손이 갈 만한 책이 없었다. 나만큼 책을 사랑하는 큰 이모가 자신이 다 읽은 신간을 꽂아두면 가서 솔라당 훔쳐보았던 기억만 난다. 어릴 때는 할아버지의 그 어려운 철학책들이 참 낯설었다.
그때 그 책장을 조금 더 반추해보자면 , 불교나 동양 철학이 대부분이었다. 유명한 스님들의 저서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전문화되어 구하기 힘든 불교 서적들까지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석가모니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불교를 너무나 사랑해 포교사로 활동하시기도 했다. 그의 불교 사랑은 남달랐고 어린 나는 할아버지가 왜 그리 불교에 의지하게 되었는 지를 몰랐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함께 자란 손녀가 이제는 불교책을 읽곤 한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자주 곁에 두고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 풍족한 시대에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내면의 평화는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30대를 넘기고 인생을 조금 살아가다 보니, 할아버지가 왜 불교에 그리 빠져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그가 철학과 종교에 그리 깊이 빠져있었던 데는 삶이 그만큼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젊은 날, 작가의 꿈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들게 살아왔던 할아버지는 삶의 고된 고비를 넘어가며 그 시절을 살아냈다.
다 크고 나서 보니, 불교책을 그리 모으던 할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 것만도 같다. 삶이 쉽지 않아 그리 책 속으로 빠져들었던 한 남자의 숭고하고 가련한 삶이 내 삶을 흔든다.
그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낸 나는 그저 속절없이 흔들릴 뿐이다. 그가 하늘에서 내리치는 죽비라도 한 대 맞고 싶어 그를 가만히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