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여행을 돌아보며
토랜스, 솔뱅, 피스모베이, 카멜바이더씨, 센프란시스코, 마우이, 호놀룰루로 이어졌던 이번 여행지는 대부분 7년 전 켈리포니아에서 지낼 때 여행하였던 곳이었다. 그 중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듯 7년 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은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이전에 느꼈던 느낌을 다시 느끼지 못해 아쉬운 곳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여전히 우리에게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고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 준다. 견문을 넓힌다는 것이 단순히 경험과 지식을 풍요롭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새로운 곳에 던져진 우리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것들에 스스로를 비추어 과거의 자신를 돌아보게 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인생의 새로운 지침을 얻게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우선 이번 여행 중에는 매래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고민을 하기 보다는 여행 자체와 그 시간들에 집중하자고 마음 먹었다. '지금 그리고 이곳'에 온전히 머물기 위한 훈련이었다. 또 아이들에게도 이번 여행의 지침으로 삼자고 이야기하였지만 아이와 아이들에게 그리고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특히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지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그 각오는 끝까지 잃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식구는 "자주" 여행을 떠났다. 지금 돌아보면 '간혹'이었는 지 '자주'였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으니 다른 집 아버지들 보다는 더 시간을 내기 쉬웠을 것이고 꽤나 잘 사는 편이었으니 여행을 가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으리라. 무엇보다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하니 다른 집들보다 '자주' 여행을 갔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가족여행 이외에도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나와 동생 혁이를 소년 신문 기자단 등에 넣어 단체로 가는 해외 연수에 따라 보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고 해외에 나가려면 안보교육과 반공교육을 필수적으로 받고 나가야 했던 때였음을 생각하면 자식에 대한 큰 투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화가와 결혼을 하였다가 젊어서 이혼을 한 작은 이모가 동경에 살아 엄마와 함께 몇 번인가 동경에 갔다. 그 당시 일본은 한국과 경제적인 격차가 상당하여 어린 나에게는 아주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는 혼자 혹은 친구와 떠나는 여행이 부쩍 늘었다. 대학 초년에는 공부도 전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 마시는 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에 자주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술을 마시다가 갑작스레 동해로 가는 기차를 타기도 했다. 일학년 여름 방학에는 승명이와 텐트를 매고 전국을 돌았고 그 다음 해에는 혼자서 유럽을 돌아다녔다. 미국에서의 자원봉사 시절, 중국 유학 시절에도 여행은 이어졌고 지금은 일년에 절반을 출장 다닌다.
나의 인생에서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일들을 모두 세어 본다면 아마 수백 번 족히 되리라. 하지만 하나 하나를 꼽아보면 구체적인 기억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어릴 적에 갔던 여행들은 "여행을 갔었다"라는 기억만 남고 언제 어디를 갔었는 지, 무엇을 했는 지의 구체적인 기억은 모두 잊혀져 버렸다. 그저 단편적인 장면들이 이것 저것 섞여서 두서 없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 많은 여행들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어느 단편 소설의 후기에 (아마도 "비둘기"였던 것 같다) 왜 책을 읽는 가에 대하여 글을 남겼다. 그가 그 동안 읽은 수 백권을 책들을 떠 올리면 구체적인 내용이 떠오르는 책을 몇 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적지 않게 시간을 투자하고 평생 지속되는 습관인데 수많은 책을 읽어도 그 내용이 그저 희미한 기억만을 남기고 잊혀져 버린다면, 책을 읽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며 스스로 질문하고 이에 답을 한 글이다. 그 당시 꽤나 책을 많이 읽던 나는 그의 질문에 크게 공감이 갔다. 수 많은 시간을 쏟아 붇는 어떤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책을 읽는 것이 단지 그 순간의 재미만을 위한 것이라면 독서의 습관은 재고해 보아야 할 일이지 않겠는가. 나의 기억에 의하면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서는 마치 용광로에 고철 덩어리를 넣는 일과 같다고 하였던 것 같다. 용광로의 안에 던져진 고철들 하나하나가 그 모양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여러 고철들이 녹아 섞여 하나가 된 쇳물이 거대한 용광로를 채운다. 지금의 '나'란 과거의 모든 경험들의 총체이다. 간접 경험인 독서는 나의 직접 경험과 함께 섞이어 '지금의 나'라는 용광로를 채운다. 여행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 하나의 여행이 각각 구체적인 깨달음이나 느낌을 주기 보다는 모든 여행과 그 안에서의 경험이 쌓여 '지금의 나'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문득, 내가 수빈이 수연이와 함께 이렇게 긴 여행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런 여행이 두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수빈이와 수연이가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 했던 여행들은 서서히 잊혀질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여행은 몇몇 장면을 빼고는 모두 잊혀져 단지 사진 속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오래된 것은 잊혀지기 나름고 또 그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우리의 여행이 나의 두 딸들에게 따뜻한 추억으로 남기를 기도한다. 부모에게서 세상 누구보다 사랑을 받고 서로 사랑했던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여 본다. 그 따뜻한 느낌을 간직한다면 우리의 여행이 그곳이 어디였고 언제였는 지, 무엇을 하였었다는 것 따위는 모두 잊혀져도 상관없다. 사랑의 추억. 그것은 인생의 보석이다. 그 추억을 간직한다면 어떠한 외로움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김수영, 거대한 뿌리 中에서)
이제 막 동이 텄다. 집으로 돌아가는 짐을 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