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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낙원 호프

숙정문 바람이 흐르는 길목에 자리한 노포 낙원

by 박종호

이제 조상님들이 정해 놓은 절기도 안 맞아 들어가는 시대가 되었구나, 지구는 이렇게 푹푹 찌다가 금세기에 끝이 나려나 보다. 입추가 지나도 전례 없는 더위가 계속되자 여기 저기서 푸념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올 여름은 참 더웠다. 오래전부터 환경 오염이 계속되면 기후가 급격하게 바뀔 것이라고, 한반도는 얼마 안 가 동남아 같은 열대 기후가 될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설마 내 사는 동안 벌어질 일이겠어 하며 무어 그리 호들갑을 떠냐라고 했던 이들도 있었다. 어쨋든 나는 모르는 일이오라고 했던 이들에게도, 큰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이들에게도 숨이 턱 막히는 더위는 공평하게 찾아왔다.


낮에 잠시만 거리를 걸어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볕에 드러낸 팔뚝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휴대용 선풍기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선풍기는 드라이어처럼 열풍을 뿜어냈고, 우람한 팔뚝의 젊은이들도 멋쟁이 중년 여인의 상징이던 양산을 들고 다니며 이 더위에 어떻게든 좀 살아보자며 안간힘을 써야 했다.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하는 밤과 오늘은 또 얼마나 더우려나 하는 걱정으로 집을 나서던 아침이 이어졌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바람이 바뀌었다. 엊그제부터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경솔하게 종말을 언급했던 이들은 자신이 뱉은 말에 머쓱해하며 우와 정말 신기하네 날씨가 며칠새 이렇게 바뀌나! 하며 헛웃음을 짓는다. 아침에 문을 나서면 시원한 공기가 코로 들어오고 밤이면 습관적으로 켜던 에어컨 대신 창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 들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제 모두들 좀 살만한 얼굴들이다.


내가 사는 안국동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근처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다. 북악산 기슭에는 도성의 사대문 중 북문인 숙정문이 있다. 옛 사람들은 이 문을 한양으로 들어 오는 음기를 막아주는 문이라고 여겼다.요즘 말로 출산율이 낮으면 숙정문을 잠시 열어 놓았고, 저잣거리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생각되면 이 문을 꽁꽁 걸어 잠구어 도성 안 백성들의 음기를 다스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오래된 동네에는 전설이 많다.


숙정문의 바람은 가회동길을 따라 내려와 안국역 사거리를 지나고, 낙원상가 지하도를 통과하여 종로로 흐른다. 시원한 바람이 부니 동네의 애주가들이 바람의 길목에 자리한 낙원호프로 모여든다. 가게 앞 인도에 빼곡하게 펼쳐진 테이블에 삼삼오오 둘러 앉아 노가리를 씹으며 맥주를 마신다. 숙정문의 바람이 시원하게 내려오는 날 낙원호프에서 마시는 맥주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꿀꺽 꿀꺽 벌컥 벌컥 잘도 마셔댄다. 지난 여름 살벌하던 더위에 복수라도 하자는 것이냐.


그 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바람이 바뀌었다.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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