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왜 쓰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오십 일이 지나간다. 100일이란 금주의 기간에 맞추어 시작한 글쓰기이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던 시간에 심심함을 달래고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보자고 시작했다. 내가 금주를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 날, 우연히 그 시기와 꼭 맞아 떨어지는 100일 글쓰기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고민 없이 100일 간의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글쓰기는 항상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다. 항상 만족스러운 글이 나오지도 않는다. 과정도 결과도 실패하는 때가 많으니 글쓰기를 자주 멈추고 싶어 진다. 그럼에도 왜 나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을까.
내가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글을 쓰는 일 나름의 좋은 면, 득이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글쓰기는 생산적인 취미이다. 소일의 거리로 생각한다면 드라마와 영화 심지어 책까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컨텐츠를 소비하는 대신, 글을 쓰면 어찌되었던 내가 만든 컨텐츠인 글 하나가 남는다. 글의 수준과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읽고 안 읽는 것과 무관하게 이 소일 거리는 자기의 기록이 남는 장점이 있다.
글쓰기를 하며 느끼게 되는 두번째 이점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이 명료 해진다는 점이다. 생각이 글로 쓰여진다고 말하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우리는 글을 쓰며 생각한다. 일상적인 우리의 생각들은 파편적이다.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진다. 글 쓰기는 이런 생각의 파편을 잡고 그 다음 생각을 물으며 대상에 대한 연속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하나의 사물 혹은 주제에 대한 연속적인 생각을 하면 그 대상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생각이 명확해진다. 어쩌면 활자화 된다는 것 자체가 생각의 애매함을 허용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매함을 적는 것은 분명함을 적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글쓰기로 명확해진 생각은 살아가는 데 여러 이로움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글로 한번 쓰여져 검토된 주제나 사물을 마주할 때 망설이지 않고 더 빠르게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다. 하루 중 우리의 눈 앞에 던져지는 수 많은 판단과 결정의 순간에 글을 쓰며 이미 한번 심도 있게 검토된 대상이 있다면 우리의 망설임의 시간과 정신적인 수고는 현격하게 줄어든다.
대상에 대한 생각이 명확하면 대상 간의 선택에도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대상간에 선택을 하여야 할 때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 어떤 결정이 더 이로운지 아닌지가 비교적 명확히 떠오른다. 나는 이것이 가치관이라 생각한다. 글쓰기를 통해 가치관이 명확해 지면 다향한 사안들에 대하여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매번 따지고 비교하는 수고가 줄고 나다운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심한 결정장애가 쉬이 낫는 병은 아니다.
글쓰기의 또 다른 역할은 ‘나’에 대한 반성이다. 글을 쓰며 다양한 대상과 사건의 논리의 연관성을 찾아가다 보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돌아 보게 된다. 다른 이들 뿐 아니라 나의 생각과 행동, 말투, 심지어 감각과 정서의 반응까지 구석구석을 되짚어 보게 된다. 자신을 3자화 시켜 바라보는, 소위 메타인지가 강화된다. 이런 관찰과 자기 반성은 그동안 무의식 중에 해왔던 습관이나 생각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기회를 준다. 또 일상 속에서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많은 것들에 대하여 의미를 깨우쳐 주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상처에 위로 받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가 올바름을 찾는 방법인 동시에 더 행복해지기 위한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란 에세이에서 작가들이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를 언급했다. 첫째 살아서는 똑똑해 보이고 죽어서는 똑똑했던 인간으로 기억되는 것(잘난 척) 두번째 리듬감 있는 언어와 단단한 산문을 만들 때 느끼는 미학적 즐거움, 세번째 기록하려는 욕망, 네번째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세상의 방향을 바꾸어 보려는 욕구 즉 정치적인 욕망. 그는 자신의 글쓰기는 이 중에 특히 정치적인 욕망이 강하다고 했다.
조지 오웰이 글쓰기의 동기를 작가의 욕망에서 찾았다면, 나는 글쓰기를 동기가 효용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이란 분은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오른 대가이니 그가 언급한 글쓰기의 동기를 나에 비추어 돌아보자면, 나는 여전히 현실에 영향을 주려는 정치적인 글쓰기를 꺼려한다. 주장을 하거나 세상에 영향을 주려는 글이 의미가 없거나 내가 현실에 대부분 만족하여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글쓰기가 논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번거롭고, 내가 여전히 남에게 무언가를 권유할 만큼 사고와 인격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더 크게는 내가 직접적으로 손해 보지 않는 일에 수고스럽게 정의를 외칠만큼 선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보건 데 격물치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중에 아직 격물치지와 수신이 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 서울역으로 향했다. 가을이 깊어 가니, 문득 순천만의 갈대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리는 열차의 창 밖으로 추수를 마친 논밭이 지난다.
(후기)
나는 워낙 변덕스러워 다른 사람과의 크고 작은 약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는 일이 많다. 이런 변덕은 스스로와의 약속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이 힘든 사람이다. 나는 이 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한번 하고자 결심한 것을 끝까지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번에 9번 째 100일 금주, 도합 1000일이 되는 금주는 간휴의 기간이 아니고 몸에 벤 습을 빼기 위한 수행의 기간이다. 글쓰기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