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인터뷰를 듣고
얼마 전 샘플을 보낸 한 업체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 본 샘플이 마음에 들더라는 내용이었고 미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나에게 자기의 사무실로 와달라고 하였다. 나는 명함 속에 있는 그의 주소를 인터넷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화성에 있는 그 회사까지는 여러 번 전철을 갈아타고도 마지막에는 다시 택시를 타고 찾아가야 한다. 나는 귀찮은 마음을 누르고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전날 비가 내려준 덕에 날씨는 쾌적했다. 교외로 드라이브하기 최고의 날씨이다. 나는 작은 SUV차량을 한 대 렌트했다. 흰색 하이브리드 차이다. 나는 차를 타면 차의 안과 밖의 세상으로 나뉘는 기분이 든다. 차 안에서는 바깥을 바라보라 보면서도 왠지 차 밖에서도 안이 보인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마치 커다란 극장 화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차 밖 세상을 관찰하게 된다.
누군가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듣거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왠지 그 사람과 점점 친해지는 느낌이 든다. 차 안에서 혼자 운전하며 듣는다면 마치 단 둘이서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집중하여 듣게 된다.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장시간 운전의 지루함을 이겨내려 유튜브를 들었다. 최근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독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인터뷰 한 내용들이었다. 노벨상을 탄 후 첫 대외활동인 며칠 전 현대 포니상 수상식에서 말한 노벨상 수상소감이 들려왔다. 자신은 술도 못하고 카페인도 끊고 재미없는 사람인 듯 살고 있지만 자신의 재미는 소설을 머릿속으로 굴리는 것이라는 말이 고막을 타고 내려와 가슴에 꽂혔다.
장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달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은 무엇인가.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일을 중심으로 생활을 재편하고, 효율을 높이려 연관성 없는 활동을 줄이고, 오롯이 자신의 삶과 일을 일치시켜 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재미없는 삶 혹은 재미없어 보이는 작가의 무미건조한 삶이 왠지 부럽게 느껴졌다. 저 대가의 날이 선 절재, 심연에서 떠다니 듯 단조로운 생활에 비하면 나의 생활은 얼마나 번잡한가.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카페인도 끊었습니다. 좋아했던 여행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입니다. 대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중략)... 그렇게 담담한 일상 속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입니다.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의 윤곽을 상상하고, 떠오르는 대로 조금 써보기도 하고, 쓰는 분량보다 지운 분량이 많을 만큼 지우기도 하고, 제가 쓰려는 인물들을 알아가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소감 중
유튜브를 찾으면 작가와의 대화나 신간 기념 인터뷰가 제법 많다. 작가가 대단히 적극적으로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타입이란 생각을 했다. 나중에 어느 인터뷰에서 듣게 된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소설에 담긴 역사적 사건과 시대적인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들, 특히 시대적 배경을 공감하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말한다. 시대적인 메시지 전달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졌다. 한강 작가의 무기는 글이지만, 작품의 최대의 목표는 작품의 메시지를 시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지만 꾸준히 글을 쓰려하며 내가 전달하는 뚜렿한 메시지가 없다는 것에 항상 글의 가벼움을 느낀다.
빠르게 지나는 창 밖의 세상을 관찰하며, 한강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래처가 될 회사에 도착했다. 작은 창고가 딸린 사무실이었다. 내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하였기에 전화를 하니 막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라 했다. 나는 차를 주차하고 볕이 좋아 창고 앞에 놓인 기다란 나무 벤치에 앉아 한동안 볕을 쬐었다. 곧 SUV 한 대가 좁은 입구를 가로질러 들어왔다. 네 명의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는 창고의 2층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통성명을 하고 미팅을 시작했다. 네 명의 여성은 각각 인접한 다른 지역의 대리상을 맡고 있었다. 제품 개발 건의와 제품 특징 등 질문과 건의가 이어졌다. 미팅을 하는 중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차 안에서 듣다만 작가의 인터뷰가 맴돌았다. 사람이 깊은 고민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면 실생활에서 느껴지는 현실적인 불만들은 매우 작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비극적인 경험과 복잡 다단한 느낌을 이야기를 통해 체험하게 해 주고, 이 간접체험을 통하여 우리 현실을 비교적 긍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깊은 슬픔과 고민에 비하면 나의 출장의 피로는 얼마나 하찮은 불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