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 건너편에 내가 자주 가는 밀면 가게가 두 곳이 있다. 두 가게 모두 이름이 '영동밀면'이다. 놀라운 것은 간판 로고까지 똑같이 생긴 두 영동밀면이 서로 다른 주인이 각각 운영하는 집이라는 것. 한 집은 대로변에서 골목을 조금 들어간 안쪽에 있고, 한 집은 대로변 1층에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 집은 안쪽에 자리한 가게인데, 두 집 밀면을 번갈아, 여러번 먹어본 나는 두 집의 밀면 맛이 우열을 가르기에 앞서 거의 같은 맛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요즘은 주로 줄을 서지 않는 집으로 간다.
그렇다면 부산의 모든 밀면들이 분식집에서 끓여주는 신라면처럼 어느 가게나 대동소이한 맛인가? 언젠가 해운대 가는 길에 택시 기사께 물었다. 부산에서 밀면은 어느 집이 제일 맛있어요? 밀면요?(부산 사투리의 엑센트를 상상하라) 허허, 밀면이야 맛이 다 거서 거기지요. 우문에 우답이 돌아왔다. 부산에서는 누가 제일 예뻐요?나 다름 없는 질문이지만 그렇다고 밀면 맛이 다 거기에서 거기라니.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것은 어릴 적부터 밀면 가게가 지천에 깔려 있고 사흘이 멀다 않고 밀면을 먹고 자라 밀면에 혀가 무뎌져 버린 부산 사람이나 하는 말이리라. 나처럼 시원한 면은 냉면 밖에 없는 줄 알고, 밀면이 무언지도 모르고 자란 서울 사람이, 아직 밀면에 질리지 않은 뻔뜩이는 혓바닥으로 밀면을 먹어 보면, 몇 집만 다녀 보아도 가게 마다 그 맛이 천차만별이다.
주말이면 새벽에 표를 사서 충동적으로 부산으로 당일 치기 여행을 떠난다. 부산행 기차는 당일 표를 잡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새벽 서너시에 일어나 KTX 어플을 열면 당일 오가는 표가 적지 않이 나와있다. 밤 새 술을 마시다가 부산행을 포기한 이들이 반납한 표들이 아닐런지? 오늘도 새벽에 부산행 표를 샀다. 서울역 6시발 부산행.
범어사에서 내려와 전철을 기다렸다. 가방을 맨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밀면에 대한 이야기였다. 점심시간이었다. 허기가 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니는 비빔은 안 묵나? 덩치가 물었다.
비빔? 똑똑이가 대답한다. 내는 고기 묵을 때나 어찌 나오면 먹기는 하지, 똑똑이는 말을 이어간다. 내가 밀면집 가서 내 돈 주고 비빔을 먹은 일은 없어. 라면을 먹는 데 국물은 와 안 먹나 이런 거지.
오호, 그렇구나! 부산 사람에게 밀면은 라면 같은 것이구나. 라면은 국물 맛인데 (국물 없는 라면은 본류라고 할 수 없지!) 라면을 끊여서 면만 먹고 국물을 안먹는 것은 정령 라면을 먹었다 할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 동안 밀면은 비빔이 본류라 생각하고 비빔밀면만 먹어온 나는 왠지 머쓱해졌다.
영동밀면에 들어왔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 30분을 남긴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물 하나요! 점원은 매번 비빔만 시키던 나를 기억하는지 '물' 맞지요? 하고 되물었다. 네. 물! 그렇게 자주 왔어도 물 밀면은 처음이다. 나는 커다란 그릇에 담긴 밀면을 육수 한 방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우고 승강장을 향해 달렸다. 뛰면서 육수로 출렁이는 배를 잡고 생각했다. 밀면은 국물맛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