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연 Jul 25. 2019

그로 인해 내가 살았습니다

반려견의 산책을 위해 부리나케 집으로 향하던 늦봄이었습니다. 한 여름에는 아스팔트 바닥이 뜨거워 밤바람을 쐬어야만 하기에 해 아래의 산책을 많이 시켜두고 싶었어요. 올해도 작년만큼 더우려나, 작년에는 정말 땅바닥에 후라이도 요리할 지경이었지, 생각하며 도착한 집 앞. 급식소 주변에 길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습니다. 


늘 같은 곳에 상주하며 밥을 먹는 아이들이지만 사람의 손을 탄 고양이는 없습니다. 가볍게라도 달가운 티를 내는 아이는 한둘. 대개는 기척에 도망치기 바빠요. 몇 개월 전 출산을 한 어미와 새끼들이 있는 탓에 경계심은 이전보다 날 섰습니다. 길고양이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쓰는 입장에서 그 모습이 조금 서운할 법도 한데 딱히 그런 마음이 들지도 않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마음은 이쪽에서도 사양입니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라도 돕고 싶지만 그 결과가 인간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야생성을 무너트리는 방향으로 연계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영원히 책임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들은 살아남아야지요. 


다시 덥고 습한 날씨로 돌아와, 나는 안갯길이라도 걸은 듯 꿉꿉한 몸으로 건물 입구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밥그릇에 푹 떨군 얼굴 너머로 동그란 등뼈가 고스란히 보이는 아이 때문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니 차마 그들의 식사를 방해하며 집으로 들어갈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십 분쯤 더 늦게 들어가도 해 아래의 산책은 가능할 터라, 오늘따라 트릿도 없네, 툴툴거리며 그들의 꿀렁이는 등과 꼬리를 구경했습니다.


그렇게 십 여분이 지났을까요. 전봇대 옆에서 무언가 슬금슬금 기척을 냈습니다. 몇 개월 전 출산을 한 어미묘, 얼굴이 너무 예뻐 미미라고 이름을 붙여준 아이였어요. 새끼를 돌보느라 온갖 사람들에게 하악질을 하고 다니던 그 아이가 어쩐 일로 대낮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어요.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너희 밥 먹는 거 방해하지 않으려고 여기 있는 거야, 하는 의미로요. 그녀는 잠시 나를 보다가 가만히 인사를 받아주고는 몸을 돌려 건물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눈이 동그래졌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고양이는 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저러나 좌불안석으로 바라보는데 그녀가 뒤를 돌아 나를 불렀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나를 부르기를 반복하는 그녀를, 나는 홀린 듯 따라 걸었어요.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 도착한 곳은 건물의 옥상. 그 텅 빈 공간 한가운데에 작은 새끼 고양이가 몸을 한껏 늘어트린 채 죽어있었습니다. 


 미미의 새끼들 중 가장 건강한 얼룩이와 미미입니다. 미미의 아이 중 하나는 결국 나의 가족이 되었고요.


미미는 모서리에 붙어 나를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무언의 요청이 느껴졌지만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리가 풀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었어요. 죽은 고양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너 나 왜 데려온 거야, 나 여기에 왜 데려온 거야, 하며 울었지만 미미는 물러서지 않더군요. 나는 결국 그 작은 고양이를 데리고 내려와 마지막을 함께 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미미는 오독오독 밥을 먹었고요. 미미가 내는 오독오독 소리가 그날만큼 서글펐던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해 아래의 산책은 실패했습니다. 깜깜한 밤. 나의 개와 가벼운 산책을 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내가 뭘 하고 돌아왔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허공을 걷는 산책이었어요.


「혹 살려달라고 나를 데려간 건 아닐까요. 사라진 아이를 보고 슬퍼하진 않을까요.」

나의 물음에 많은 길고양이를 돌보는 누군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고양이들도 자기 아이가 죽은 것은 다 알아요.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렸다가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다른 이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먼저 처리해달라는 거죠. 저도 비슷한 경험이 많아요. 처음에는 정말, 얼마나 놀랐던지. 하지만 이제는 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 도움을 청한다는 사실이 고맙고 짠해요.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해서 속상한 마음이 무뎌지지는 않지만 그나마 마지막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게 어디인가 싶어요.」


길고양이들의 모성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임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양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걷듯 아픈 새끼를 재생산하는 고양이. 사람의 손을 탄 새끼는 돌보지 않는 고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새끼를 믿을 수 있는 인간에게 데려다주는 고양이. 

어쩌면 고양이의 모성은 험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어요.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나누어 쓰고 싶은데 그게 무어라고 참 녹록지 않아, 나에게도 별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기꺼이 울며 돕는 일 밖에요. 


하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를 기억할테지요. 

먼 훗날, 달가운 얼굴을 하고 이렇게 인사해 줄지도 모르겠어요. 

「별 것 아닌 당신의 애정으로 인해 내가 살았습니다.」



이전 08화 밤을 닮은 고양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