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딛다

by 유재은

특별한 월요일을 맞이했다. 당분간 이렇게 각별한 하루들이 이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불속에서 늑장을 부리는 아침이 행복했다. 내게 하루가 온전히 주어졌다는 생각만으로도 여행을 하는 듯했다. 무엇을 할까. 아니 굳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앞으로 3주의 휴가를 어떻게 보듬고 찬찬히 누릴지 아직 아무런 생각이 없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지막이 일어나 오랜만에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 막내와 늦은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돌아온 집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 좋아하기에 막내의 도움으로 집안일을 마친 후 어느새 겨울 단장을 한 카페로 나왔다. 집에서 글을 쓸 수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또 그렇게 나오고 싶었다. 여유로운 월요일 오후가 아닌가. 수업 시간을 살피며 글을 쓰지 않아도 되니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카페를 나서면 겨울 옷 구경도 하고 서점에 들러 나의 책을 토닥여 주고 올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생각할 게 많지만 당분간은 마음에 여유가 흐르도록 가만히 두고 싶다.


26년간 어린이들의 글쓰기를 가르쳐왔다. 출산 후 몇 달만을 제외하고는 쉬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 내게 3주간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바다가 가까운 신도시로 이사오기 전까지 서울에서는 초등학교 방과후학교 논술 교사로 일했는데, 이사 후에는 글쓰기 교실을 위한 아파트를 마련해 수업을 해왔다. 그렇게 9년, 드디어 지난주에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되었다.


가르치는 삶에서 쓰는 삶으로 내딛고 싶은 마음. 그것을 완전히 이룰 수 없는 현실이지만 조금의 변화를 갖기로 했다. 우선은 수업을 줄이고 차차 도서관 수업 등으로 방향을 전환할 마음도 생긴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저녁 수업의 피로감이 컸지만 그보다는 쓰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쓰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학생수도 줄이고 책이 있던 작은 방을 글쓰기 수업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그동안은 넓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책이 많은 다락방 같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이면 아이들도 작가가 된 듯한 느낌으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9년 간의 공간에서 마지막 수업을 했던 지난주에는 책 나눔을 했다. 아나바다에서 책에 대한 무관심을 확인했던 경험이 있기에 별 기대 없이 5권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더 가져가면 안 되는지 물어보는데 왜 안 되겠는가. 읽고 싶은 아이들에게 책이 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뻤다. 스무 권을 가방 두 개에 꽉 채운 아이들도 있었는데, 힘들지 않을지 걱정하는 내게 환한 웃음으로 당연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10살부터 수업했던 4학년 소녀들은 낙엽 편지와 함께 글쓰기 교실로 오는 길을 영상으로 찍어 선물해 주었다. 크리스마스 음악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보기만 해도 미소가 번지며 마음을 몽글거리게 해 준다. 처음 만날 때는 아가들 같았던 3학년이었는데 어느새 5학년을 앞두고 있으니 이만큼 또 자란 것이다. 그 모습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지며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덕분에 올 가을의 마지막은 근사한 선물로 기억될 것 같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퇴근한 큰 딸을 태워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입사 3개월이 지난 기쁨이는 용돈을 타던 때와 달리 넉넉한 지갑에 쓰는 품새도 더욱 따뜻해졌다. 기쁨이에게 축하 고깔모자와 맛있는 쿠키를 선물로 받고 좋아라 들어갔는데, 집에서는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기다리던 막내 장군이가 나를 맞이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딸들이라니! 남편은 오랜만에 손 편지를 주며 감동받았냐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 말만 안 했으면 오래오래 감동이었을 텐데 말이다. ^^ 그렇게 금요일 밤에는 가족들과 즐거운 치킨 파티를 했다.


마지막 퇴근 전, 텅 빈 책장과 수업 교실을 사진으로 남겼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쩌다 보니 오래도록 강의를 했다. 처음 글쓰기 교실을 열기 전 텅 빈 아파트를 보며 과연 오는 학생들이 있을까 무거웠던 마음이 떠오른다. 그래도 막상 시작하자 더 이상 학교 선생님들 눈치를 보며 교실을 빌려 수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그렇게 나만의 공간에서의 감사했던 글쓰기 교실 1막을 마치며, 또 하나의 내딛는 삶의 길을 두려움 대신 환하게 맞이하고 싶다. 며칠 전 우연히 마주한 영화 같던 아침 해돋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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