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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으다

by 유재은


단어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새로 발견한 우표를 수집하고 네잎클로버를 책장에 고이 넣어두었듯이 우리말을 마음에 담아둔다. 그렇게 모아둔 단어들을 하나씩 꺼내어 문장으로 엮으면 소란스러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렇게 생의 어느 날을 살아간다.

작은 수첩을 갖고 다니다 낯선 단어를 기록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작가들은 꽤 많았는데 무엇을 해도 느슨하게 하는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저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을 뿐인데, 나이 들수록 기억력은 감퇴해도 단어는 그것을 담고 있는 문장이나 어떤 장면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어서인지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른다. 물론 그러다 오래 간직하고픈 단어를 떠나보낸 후 안타까워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휴대폰 메모장도 잠시 활용했는데 저장해 둔 단어가 있는지조차 몰라서 그만두었다. 최근에는 글을 쓰기 위해 단어를 모은다. 그렇게 발견한 순우리말 색채어를 삶으로 엮어 책을 출간하고, 동사를 모아 이 연재글을 쓰고 있다.


단어 하나가 문장이 되고 한 편의 글을 불러오다니 새삼 감탄하게 된다. 단어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처럼, 글로 자주 쓰는 단어가 삶의 빛깔을 만들어준다. 새롭게 만난 단어는 뜻을 헤아리며 가만히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진다.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삶이 움직인다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이들과 수업하다 보니 신조어를 자주 접한다. 그럴 때면 뜻을 알아맞히는 것도 재미있고 자꾸만 틀리는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웃음도 좋다. 신조어는 맘충(육아하는 엄마를 비하하는 의미)이나 틀딱(틀니와 틀니 부딪치는 소리를 합쳐 노인을 비하하는 의미)처럼 특정 집단을 향한 비아냥으로 모욕적인 단어도 있지만, 텍스트힙(‘힙하다Hip’와 ‘글Text’을 합쳐 독서가 멋진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이나 추구미(추구하는 미적 스타일)처럼 트렌드를 알 수 있고 직관적인 의미 조합의 단어도 있다.


수업 때 한 아이가 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다른 친구를 향해 "윽, 긁혔네."라고 말하며 웃는 것을 보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서로의 분위가 좋아서 그것이 괜찮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상처받았음을 상대에게 불편하지 않게 전할 수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왠지 그 표현이 문학적으로까지 들렸다. '마상'이라는 신조어도 그랬다. "너 때문에 상처받았어."라고 말하기보다 "마상이야."라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이들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좋았는데 실제 성인과의 대화에서는 써 본 적이 없어서 그 단어의 감정 전달 효과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외모에 대해, 걱정이라는 포장지로 싼 폭탄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쓰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마상...이에요."라고 하거나 "아, 저 긁혔어요."라며 살짝 미소 지으면 상한 감정을 서로가 불편하지 않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긁혔다'는 말은 '긁'이라고도 쓰이는데 부정적 의미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자극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뜻을 알고 나니 실제로 해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지.

누군가를 만나면 그가 사용하는 단어가 그와의 인연을 공고히 해준다. 때로는 마음의 온도가 식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해지는데, 그래서인지 SNS는 참 어렵다. 한 문장 쓰는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꽤 흘러 있고, 그러다 보면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빠진다. 그래서 브런치가 편하다. 느리게 걸어도 되는 곳이니까. 브런치에 있는 서랍 속에는 모아둔 단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하나씩 초콜릿처럼 베어 물며 문장을 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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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