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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다

by 유재은


살수록 말이 어렵다. '그 말은 덜어낼 걸' 하는 후회가 잦아진 요즘이다. 만나는 사람이 드물고 말수도 적은 편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나이 듦에 따라 말이 늘어난 게 아닐까 염려되기도 했다. 그것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관계를 무겁게 여기는 게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마주한 사람에게, 또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다 보니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말을 꺼내게 된다. 어색함을 덜고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모든 에너지를 솟는다. 작은 성량을 한껏 끌어올리고 내 안의 단어를 찾아 헤매며 최대한 밝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후 돌아서면 온몸에 힘이 빠진다. 하지 않아도 되었을 말이 오래도록 나를 붙든다. 상대를 위한 마음이었지만 그것이 결국 나를 소진시키고 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도 부끄럼 많고 조심스러운 성향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은 그로 인한 반응과 갈등을 두려워했음이리라. 그러한 이유로 스스로를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성격만큼은 둥글둥글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예민함을 주제로 한 책이 서점에 많아진 것을 느꼈을 때도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여겼다. 살아오며 그것 때문에 고민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적어도 말에 있어서 만큼은 무디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까끌한 돌멩이가 되어 마음을 구른다. 그렇게 한참을 아리고 아프다.


나이가 들수록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지 혼자 조용히 하는 걸 좋아해서 지금도 홀로 일을 한다. 글을 쓰는 일도 오롯이 혼자 할 수 있기에, 찬찬히 언어를 덜어낼 수 있기에 깊은 마음을 내어주게 된 것이 아닐까. 학창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도 회사에는 다니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조직에서 제 몫을 해내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나로서는 도저히 못해낼 일이다. 많은 관계 속에서는 선의로 건네 말이 오해로 남기도하고, 대화 후에도 서로의 말에 담긴 뜻을 곱씹는 두 번째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기우는 대로 걷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또 많은 말을 해야 했다. 독서 후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도 해야 하는 글쓰기 선생님이니 말이다. 그런데 수업 때면 아이들이 나를 외향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것은 모두 아이들 덕분이다. 어린이들의 말은 비눗방울 같다. 퐁퐁 튀어 오르면서도 투명해서 나도 함께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어린이들은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속내가 드러나는 표정은 마냥 예쁘고 때때로 만나는 꼬마 철학자들의 말도 고맙다.


그러나 여전히 어른과의 대화는 어렵다. 불필요한 말을 덜려고 노력하면서도, 지나치게 애쓰다 보면 어느새 하지 않아도 될 말이 보태어지고 또다시 대화를 되새긴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예민함에 대한 사회적 시선 때문이 아닐까. 보편적으로 여겨졌던 부정적 인식이 나를 움츠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아지며 예민함은 '섬세한 알아차림'이라는 걸 깊이 느끼게 되었다. 타인과 세상을 향한 '헤아리는 마음', 그 예민함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 있어서만큼은 그 예민함을 조금 덜고 싶다.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동동거리다 다치지 말고, 나의 마음을 더 헤아려도 괜찮다고 안아주고픈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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