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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6. 2023

독서모임으로 먹고삽니다

 난 커뮤니티로 먹고 산다. 이제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지금 내가 얻는 수익 대부분이 커뮤니티에서 오고 있으니까. 작가가 본업이고 커뮤니티 운영은 부업이지만, 지금 얻는 수익으로 보면 커뮤니티가 주업이고 작가는 아르바이트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스물여섯 살부터 시작한 독서, 영화, 글쓰기, 러닝 모임이 이제 직업이 되었다. 취미로 시작한 독서모임이 이제 나를 살아내게끔 한다. 경이로운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고료로 출간 인세로 먹고살고 싶지만, 책과 관련한 일로 돈벌이를 한다는 게 꿈만 같다. 가끔 커피를 마시다가 도리질을 치며 꿈에서 깬다. 취미가 노동이 됐는데 정말 꿈만 같기만 할까. 아마도 꿈과 생계 그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내가 퇴사를 결심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커뮤니티에 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독서모임을 십 년 넘게 한 번도 쉬지 않고 진행했다. 난 질보다 양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독서가 질리지 않는 만큼 책을 다 읽고 모임을 하는 것도 질리지가 않았다. 몇 년 전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난 뭔가 대단한 통찰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친구에게 말했다. 

 '야 난 독서모임을 평생 할 것 같다. 이제 헬스만큼 독서모임 진행도 편해졌어.'

 '너 거기 여자 만나러 가는 거 아냐?'

 '아냐. 난 진짜 책으로 얘기하는 게 좋아. 그냥 여자가 책을 더 많이 읽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여자가 책을 더 많이 읽어서 독서모임이 좋아진 거구나.' 

 '아니 이 새끼야. 독서를 좋아해서 독서모임을 하는 거라고. 여자든 남자든 책 읽는 사람이랑 대화한다고.' 

 '알겠어 알겠어. 독서를 좋아해서 책 읽는 여자 사람도 좋아한다는 거구나.'

 '이 새끼는 문맥을 못 짚네. 책 좀 읽어라. 됐다, 됐다. 그냥 유튜브나 계속 봐라.'

 난 언젠가부터 독서모임으로 먹고사는 상상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그려졌다. 19세기 프랑스 벨 에 포크에 '뢰 되 마고', '드 플로르' 같은 카페에 앉아서 책과 영화에 관해 실컷 수다를 떠는 모습이 그려졌다.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면 그런 생각에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한몫했다. 난 이른 나이에 취업해서 이 도시 저 도시 전전하며 살았다. 근무지가 하도 불규칙해서 느닷없이 서울, 대구, 원주, 대전, 프랑스에서 터를 잡았다. 난 그런 떠돌이 삶이 좋았다. 잦은 이사에 세간은 단출하고 차림새는 초라했지만 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가족과 친구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톡이 잠잠해지자 일상에는 정적만 흘렀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책, 영화, 글쓰기, 운동 끝! 아 완벽해!' 하지만 어떨 때는 지독히 외로웠다. 고요함이 굉음처럼 들리는 말이 잦아지면서 일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스물 중반, 처음 강원도 땅에 떨어졌을 때가 가장 심각했다. 냉기가 흐르던 그 차가운 방. 냉장고 하나 그리고 작은 싱글사이즈 침대. 그 정도가 그 나이에 내가 이룬 삶이었다. 그 다섯 평 남짓했던 방에서 난 책도 읽고 라면도 끓여 먹었다.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는 고립감을 뜨끈한 신라면 국물로 댑혔다. 주말이 되면 심심해서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와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유튜브를 봤다. 신작 영화를 보고 브런치에 글도 올렸다. 운동도 하고 옷도 깔끔하게 사서 입었다. 근데 아무리 따듯한 곳엘 들어가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 '이 망할 놈의 강원도. 진짜 뒤지게 춥네!' 당시에도 누군가와 연애를 했지만, 아무리 대화를 해도 통하지 않고 뭔가 다툼만 잦아졌다. 


 어느 날인가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몸뚱이가 열에 펄펄 끓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타이레놀을 까먹으며 휴식을 취해도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컴컴한 방에서 이불을 웅크리고 누워서는 비참한 기분에 시달렸다. 주말은 길었지만 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인스타그램에서 서울에서 열리는 독서모임 트레바리를 광고를 봤다. 내 아이폰은 여기보다 거기가 더 나을 거라고 내게 속삭였다. '뭐야. 아이폰이 말을 하네. 이거 시리인가?' 따듯한 공간에서 차 한잔씩 마시면서 책 얘기나 하는 그들이 귀족으로 보였다. 창밖으로 창덕궁이 보였고, 테이블 위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놓여있었다. '저거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난 갑자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 빼고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야. 나만큼 쿤데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난 이유 없는 소외감에 치를 떨었다. '지들이 문학을 얼마나 안다고. 독서모임씩이나 열어? 뭘 안다고 씨부려!' 난 열이 내리고서야 그 분노가 외로움과 질투라는 걸 깨달았다. 


 난 다시 트레바리 홈페이지를 유심히 쳐다봤다. '다들 직장인인가. 뭐여! 독서모임 네 번에 20만 원이라고!' 광고는 연출 사진이었지만 죄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다리를 꼬고 웃고 있는 게 다들 팔자가 좋아 보였다. 난 솔직히 저게 사는 거지 싶었다.(알고 보니 광고 속 미소 짓는 분들은 다 직원들이었다는) 광고는 나를 적중했다. 그 과장된 미소와 상술은 내가 강원도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만들었다. 난 복부에 자상이 생긴 사람처럼 침대에 웅크린 채 독서모임을 하는 날 상상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단정하게 웃으면서 아는 척하는 내 모습이 근사했다. 그날 저녁으로 몸보신차 근처 횡성에서 소고기를 사 먹었지만, 차오르기 시작한 정서적인 허기를 달랠 수는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난 아마 그때 양질의 대화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내가 읽고 보는 책과 영화를 남과 나누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난 내 취향을 사랑했지만 그걸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말 그대로 고독한 독서에 허영이 자리르 튼 것이다. 나도 책 꽤나 읽는 놈이니, 그들의 대화에 나도 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딱 그러고 있어, 기다려 이 자식들아!'


 난 그렇게 트레바리 파트너로 커뮤니티에 입성했다. 그날 이후로 난 금요일 밤만 되면 내 낡은 해치백 차를 몰고 격렬하게 액셀을 밟으면서 강원도와 서울을 오갔다. 차 엔진에 불이 붙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속도를 올렸다. 아마도 누군가가 내가 모는 차를 봤으면 아마도 '저놈 신상에 변고가 생긴 구로구만', 추측했을 것이다. 한문철 TV에 등장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다. 내 차가 서울로 진입할 때 찾아오는 설렘과 안도감을 기억한다. 남산이 보이고, 창덕궁이 나타나면 모든 게 나아졌다. 


 난 왜 이런 취향 공동체에 몰두하게 됐을까. 난 어려서부터 집단을 강조하는 조직에서 외떨어져 지내려고 했다. 자꾸만 뭉치라고 하니 반항심에 점점 더 거리를 뒀다. 그래서 내가 혼자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주위가 한산해지자 직장에서 겪는 ‘관계의 결핍’이 늘어났다. 그러자 내가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의 크기도 커졌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꾸려 가고 싶은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지도, 누군가에게 말해볼 기회도 없었다. 그저 입 다물고 수긍하고 살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컷 글을 써 내려가면 후련했지만 아직 뭔가가 빠져있었다. 방금 사랑니를 뺀 사람처럼 입속 어딘가가 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고립된 1인 가구의 삶을 실감 나게 글로 적으면서 구독자를 얻었지만, 거기에서 관계를 얻을 순 없었다내가 혼자라는 걸 시위하는 글쓰기는 나를 포장한다는 의미에서 멋이 있었지만, 방에 웅크리고 있으면 개폼이라는 게 드러났다. 내 지나치게 음울하게 감상적인 글이 지겨워졌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접영을 친다는 구독자의 댓글에 경악했다. 


 난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나서야 어울리고 싶은 친구를 찾아냈다. 난 사람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나와 동종의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트레바리 안국아지트 문을 열면 내 바람처럼 창덕궁이 눈에 들어왔고, 거기서 내가 좋아하는 책에 관해 실컷 얘기할 수 있었다. 독서모임 친구들을 만나면서 난 서로에게 힘을 주는 취향 기반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었다. 내 글에 다양한 직종의 등장인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뿐만이 아니라 너와 그들이라는 3인칭 주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풀어쓰는 관계지향적인 글에 재미를 붙였다. 관계가 풍성해지자 내가 그리려는 고독의 의미도 명확해졌다. 상대를 염두에 둔 거리는 무작정 혼자서 살겠다는 치기가 아니라, 상호연관성을 지닌 거리 재기로 탈바꿈했다. 


 직장에서는 내가 쿤데라 얘기를 하면 미친놈처럼 쳐다봤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딴짓이나 한다는 투였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 쿤데라는 스타작가였다. 다들 쿤데라가 어디 사람인지 왜 과거에는 체코어로 소설을 쓰다가 지금은 불어로 출간하는지 신기해했다. 그해 노벨문학상은 누가 받는지, 대체 쿤데라는 왜 상을 못 받는지 화제에 올랐다. 요즘 한국 소설계에서 최은영과 김금희가 왜 그토록 각광받는지, 올해 젊은 작가상 소설 중에는 어떤 작품이 최고인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난 독서모임에 푹 빠지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플랫폼으로 꼽히는 '문토', '아그레아블', '트레바리'에서 연달아 모임을 진행했다. 그들이 보유한 안국동, 홍대, 강남 아지트는 내 추억의 보고다. 트레바리 안국 아지트는 나의 젊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근처 통의동과 익선동을 산책하다가 커피를 마시고 모임을 진행하던 시절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다. 


 독서모임을 하면서부터 나도 '책 읽는 직장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어서 글쓰기 모임을 진행할 땐 '글 쓰는 직장인'이라는 부캐도 생겼다. 러닝크루를 운영하면서 '운동하는 직장인'이라는 말도 들었다. 회사에서 직함으로만 불렸던 내 정체성이 부옇게 묽어졌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모임을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글 쓰고 모임만 하고 사는 삶이 코 앞에 다가왔다. 회사를 그만둬도 모임으로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지 있을까. 매일 출근하는 것처럼 글 쓰고 독서모임을 진행하면 살만할 것 같았다. 난 그렇게 커뮤니티를 즐기면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독서모임 플랫폼 사이트에 들락거리며 어떤 새로운 모임이 생기나, 어떤 모임을 만들어볼까 고민하는데 익숙해졌다. 한 달에 모임만 10번 가까이 나가다 보니 수익이 꽤 생겼다. 내 입장에서 커뮤니티는 늘 하는 독서와 영화감상 그리고 글쓰기를 하면서도 돈까지 벌 수 있는 낭만이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삶을 꿈꾸게 했다. 그럴수록 직장에서 버텨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사고도 쳤다. 넋이 빠져서 회의실을 들락거렸고, 상사의 질책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았다. 왜냐고? 빨리 퇴근하고 독서모임에 가면 되니까. 믿는 구석이 생긴 거다. 


 세상에 벌써 11년이다. 난 뭐든 꾸준히 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데 헬스만큼 오래 한 것이 독서모임이다. 어째 생각해 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독서모임을 멈춰야겠다고 여긴 적이 없다. 독서모임은 항상 옳았다. 내가 고른 책을 함께 읽고 키득거리며 대화하고 함께 뒤풀이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떠들면서 삶이 나아졌다. 취향으로 이뤄진 관계는 그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난 의무감과 압박감이 없는 ‘느슨한 관계’ 속에서 편안했다. 그동안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던 건 용기 부족이었다. 서른 후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라고 말하는 시기다. 생애주기에서 삶의 방향을 대부분 결정짓는 나이다. 그때 진로를 찾겠다고 밖을 나서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업이라고? 무슨 돈으로?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이런 지독한 현실감각이 날 억눌렀다. 하지만 결국 난 나왔다. 독서모임이나 하면서 살려고 두리번거렸다. 


 취향을 바탕으로 한 모임은 ‘세부적’이고 ‘일시적’ 일 수밖에 없다. 이건 누군가에겐 단점이다. 가짜 관계로 보일 수도 있다. 관계에 결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상대는 흐려지지만 나는 점점 더 명료해진다. 커뮤니티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자기 자신과 모임을 매칭하는 적극성을 수반한다. 모임은 역동적면서도 작은 디테일에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계속 모임을 선택하고 참가하다 보면 자신의 취향을 섬세하게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일종의 심미안이 생겨나는 것이다. 난 독서모임을 통해 이제 작품을 볼 때 좋은 것과 가짜인 것을 구별하는 눈이 생겼다. 친구와 가족에게는 들을 수 없는 진짜 대화가 뭔지 깨닫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난 내가 진짜 뭘 좋아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확정할 수 있었다. 난 그렇게 독서모임을 통해 작가가 됐고, 퇴사를 한 지금도 양질의 책과 진짜 대화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올해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독서모임 플랫폼을 인수해서 '나를위함'이라는 사업자를 냈다. 개개인의 관심사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클럽을 열고 있다. 내가 커뮤니티에서 즐기고 몰두했던 젊은 날의 시간들이 날 여기에까지 이끌었다. 난 사업을 시작도 하기 전에 커뮤니티에서 경력직이 됐고, 졸지에 독서모임에 관한 강연도 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지난주에 강연에 오르기 전에 행사 담당자게 내게 물었다. '작가님을 나를위함 대표로 소개할까요. 아니면 그냥 작가라고 얘기할까요.' 난 잠시 생각하다 얘기했다. '둘 다요.' 무대에 오른 강연에서 나는 커뮤니티가 가진 건전한 관계의 효용을 얘기했다. 지속가능한 안정감. 과하지 않은 다정함. 슬며시 미소가 흘러나올 정도의 조심스러움. 예쁜 공간에서 좋은 책을 읽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문학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의 모습.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신나게 떠들었다. 날 멀뚱이 쳐다보는 객석을 향해 난 트레바리 광고에나 나올법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강원도에서 날 구해냈던 독서모임이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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