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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2. 2023

궁상맞은 글이 도움이 되는 이유

 내가 스물다섯 살 첫 직장을 다닐 때는 경기도 외곽 투룸 방에서 혼자 살았다. 목돈이 없어 서울 시내에 집을 구할 수 없다 보니 지나치게 먼 동네에 방을 잡았다. 아침저녁으로 버스에서 두 시간씩 잡아먹혔다.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 녹초가 돼버렸다. 출근길은 자유로라는 도로 이름과 달리 항시 차가 막혀대는 탓에 지칠 대로 지쳤다. 버스를 가득 매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난 이런 처지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풀린 눈으로 버스에서 골골거리다가, 빌딩 숲에 다다르면 한숨을 내쉬며 우르르 빠져나가는 좀비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긴 한데 그렇게만 살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찝찝함을 아는지. 고인 물속을 부유하는 미생물이 된 기분. 유폐된 채 모든 고민을 유예시키는데 익숙해져서, 지금 하는 일이 부유한 삶을 위한 건지 아니면 간신히 퇴근해서 편의점에서 산 유부초밥을 먹기 위해 부유하듯 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십 년쯤 지나 유부남이 되면 또 어쩔 수 없이 지금처럼 출퇴근을 반복하면서 노동하는 기계가 될까 두려웠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두려움을 제대로 직면하지도 못하는 뜨내기에 불과했다.


 난 자유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되뇌었다. '이게 아니면, 그럼 어떻게 살아?' 난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어떻게가 어딨어. 그냥 맛있는 커피 한 잔 사 마시자.' 난 매일 을지로에 있는 예가체프 핸드드립 커피를 사 마셨다. 무려 7천 원짜리. 아침마다 생두를 직접 프라이팬에 볶는다는 수염 많은 바리스타의 걸작. 고생하며 사는 날 위한 선물이었다. 그렇게 커피로 날 마취시키며 일하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밤늦은 시간이었다. 파주 내 자취방에서는 가끔 북에서 송출하는 대남방송이 들려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주술처럼 느껴지는 섬뜩한 소리였다. '쥐새끼 밑에서 돈만 보고 사는 종간나 새끼들아, 존엄 높은 우리 공화국의 최고령도자이신 위대한 김정은 동지를 받들라.'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아침만 되면 커피 한 잔으로 연명하는 날 꾸짖는 소리였다. 


 내가 살던 동네는 대체로 고요했다. 아니 소리보다는 시선이 고요했다. 눈이 탁 트여서 좋았지만, 점차 눈 둘 곳이 사라져 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소란 속에서 침착하게 앉아 있기를 바랐다. 화려한 을지로의 술집,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는 재미. 너무 외로워서 내가 살던 평촌이 그리웠다. '난 여기서 지금 뭘 하는 거지.' 우선 너무 외로웠다. 내 삶이 괜찮다고 위로해 줄 말이 필요했다. 혼자 그런대로 잘 놀았지만 다정한 눈빛과 쓰다듬는 손길을 대신할 순 없었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보며 살면서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독서모임도 하지 않았던 시기라 그런지 독서도 더뎠다. 가끔 들르는 헤이리 예술영화관 정도가 내 유일한 낙이었다. 


 끼니는 보통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이마트 편의점에서 때웠다. 1,900원짜리 닭가슴살과 도시락, 라면 그리고 과일과 우유를 사서 먹었다. 근처에 마트가 없으니 비싸도 어쩔 수 없었다. 허허벌판에 지은 오피스텔 건물은 집주인이 노후를 위해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지은 건물이었다. 주인 할아범은 틈만 나면 편의점에 들어가서 잔소리를 했다. 언젠가 한 번은 할아범이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건물 밖 청소를 안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난다고 난리였다. 때마다 편의점 알바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대로 했다. 할아범의 말투는 한 소리 해주고 싶을 만큼 무례했지만, 내가 일터에서 당하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나 역시 사무실에서라면 아르바이트생처럼 별말 없이 꾸지람을 견뎠을 것이다.


 집 밖은 너무 추웠다. 허허벌판이 있는 동네는 바람이 고스란히 오피스텔에 들이쳤다. 십만 원 주고 산 토퍼에 누워서 누에고치처럼 몸을 구기고 유튜브를 봤다. 어차피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차가운 도시락이 지겨우면 프라이팬에 도시락을 다 쏟아 넣고 볶아먹었다. 요리는 사치였다. 장 보고 조리하고 설거지하느라 주말을 날릴 순 없었다. 라면이 지겨우면 김치를 더 넣어서 찌개를 만들었다. 주말이라고 약속을 잡을만한 친구도 없었다. 영화라도 보려면 또 지긋지긋한 버스를 타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싸도 합정이나 상수 근처에 집을 구했으면 전시회라도 보러 갔을 텐데.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개천가와 동네 카페뿐이었다.


 편의점에 자주 들르니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선점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늘 핸드폰만 보고 있어서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지만, 내가 도시락을 고를 땐 말도 없이 다가와서는 할인하는 제품을 가리켰다. ‘감사해요. 늘 신세를 지내요.’ 한 번은 말을 걸어봤지만, 고개만 끄덕이고 카톡창으로 돌아갔다. 파주땅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지인이었지만 아무 말도 나눌 수 없었다. '나도 사무실에서는 아무 말 안 하니까.' 아르바이트생은 항상 아식스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초록색 유니폼 차림이었다. 거의 매일 일하는 걸로 보아서 프리터족이 아닐까 상상했다. 상상을 버릇처럼 반복하니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하면 뭘 할지, 집에서는 뭘 먹을지 떠올랐다. '너도 나처럼 지금은 생의 모라토리움 기간일까.' 난 파주에서의 시간을 내가 버텨내야 할 지불유예기간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로 연명했다. 아르바이트생의 침울한 표정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상상했다.


 일터를 제외하고 대화다운 대화는 오직 SNS에서만 나눴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은 물론이고 만남을 주선하는 랜덤 채팅도 가라지 않고 깔았다. 외로움이 빚어낸 기행이었다. 그렇다고 온라인에서 놀 마음은 없었다. 기회가 되면 SNS를 통해 동년배의 친구와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도 분명히 나처럼 심심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빨간 버스에 탄 수많은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들 방구석에 처박혀서 월요일 출근만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그들을 불러내고 싶었다. 과거엔 나도 클럽에 가서 놀만큼 밤문화를 즐겼지만, 그러기엔 너무 늙었다. 이 시골 땅에 어울리는 목가적인 취미가 필요했다. 온라인의 장점은 뚜렷했다. 빠르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선호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하면 적합한 상대들을 이어줬다.


 타지로 와서 말수가 확 준 난 온라인에서만큼은 활발히 소통할 수 있었다. 아이디를 '앙리 다비드 소로'라고 만들었다. 소로라는 이름표를 단 나는 한 대화방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내 심심함을 심심하게만 바라보지 않는 다정한 기운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이성을 잇는 서비스였는데, 상대는 ‘립반윙클의 신부’라는 아이디를 썼다. 대화방에 들어오자마자 터놓고 얘기를 나눴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어느 순간부터 번호를 교환하고 장문의 카톡으로 일상을 함께했다. 고독한 소로는 모처럼 대화다운 대화를 하면서 점차 현실의 피폐함과 멀어졌다. 혼자 보내는 주말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두 사람 다 만남을 재촉하지 않았다. 소로는 실제 립반윙클의 신부가 궁금하지 않았다. 사이버 스페이스 상에서 예의를 차리고 얘기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카톡으로 오가는 일상의 전시가 정겨웠다. 옷을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 돈도 들지 않았다. 가끔 사진을 찍어 보냈고, 같은 유튜브 영상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모티콘 몇 개만 돌려써도 다정한 기운이 차올랐다.


 며칠 전 난 립반윙클의 신부와 동네 얘기를 하다가 우리가 불과 두 블록 거리에 산다는 걸 알아버렸다. 개천 맞은편이 립반윙클의 신부 집이었다. 옆 동네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다. 자연스럽게 만나자는 말이 나왔고, 약속이 잡혔다. 난 마음이 복잡했다. 직접 보면 내 모습이 다 드러날 텐데, 그러면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 보면 판가름을 내야 하니까. 관계를 규정해야 하니까. 관계를 유예한 채 상상만으로 지속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무턱대고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오후 두 시 약속인데 초조함에 두 시간이나 일찍 나섰다. 그간 결혼식 아니면 입을 일이 없던 셔츠도 꺼내 입었다. 커피를 마시고 갈 식당과 저녁에 근처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회도 찾아놨다. 국내 중견 작가의 전시였는데 건물에 딸린 카페가 근사했다. 카페에 앉아서 그간 나눈 대화 내용을 쓱쓱 올려보면서 복습했다. 그간 얼마나 깊고 방대한 대화를 나눴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둘은 시도 때도 없이 속사정을 털어놨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긁어다가 붙였다. 둘 다 이 시골 동네에서의 삶이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립반윙클의 신부를 알 것 같았다. 립반윙클의 신부도 날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카톡으로는 라면을 끓이고 청소하는 일상까지 특별하게 전시했다. 직접 얼굴을 보면서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떠한 관계의 형식 안으로 들어가면 그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해야만 한다. 남들이 의례 하는 것처럼 서로를 대해야만 할 것이다. 난 항상 만지고 부둥켜안을 수 있는 관계를 바라 왔건만,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담감에 목이 탔다. 차가운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어제 술을 잔뜩 마셔서인지 몸에 미열이 있었다. 창밖 햇살이 따듯했는지 카페에서 선잠이 들었다. 옆 테이블에 나와 머리를 비슷하게 깎고 유사하게 옷을 입은 남자가 비스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벌떡 일어나서 카페를 나섰다. 립반윙클의 신부에게 주려고 사 온 작은 화분을 일부러 카페에 남겨뒀다.


 이제 55분. 톡으로 '오늘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미안하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급히 집으로 향하는데 어디론가 바삐 걷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보였다. '어딜 가는 거지. 잘 차려입었네.' 편의점 녹색 유니폼만 보다가 처음으로 외출복을 목격했다. 아식스 운동화 대신 끈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고동색 벨벳 코트가 제법 잘 어울렸다. 역시 길을 걸으면서도 휴대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부지런히 엄지손가락이 보였다. 누구에게 카톡을 하는 걸까. 립반윙클의 신부는 별말이 없었다. 편의점 학생은 버스정류장 근처에 잠시 서서 개천 너머를 바라봤다. 한쪽 발을 정류장 기둥에 대고 서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돌아서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뭘 두고 왔나.' 그때 립반윙클의 신부가 자기도 오늘 못 나갈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라.' 나는 정중히 사과했다. 립반윙클의 신부도 정말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했다. 난 슬슬 배가 고픈 참이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집에 사다 놓은 도시락 생각이 났다.


 왜 난 그때 립반윙클의 신부를 만나지 않았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근데 그날 이후로 난 브런치에 새 계정을 만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리뷰와 서평도 썼지만 대체로 혼자 사는 삶에 관해 적었다. 사람을 만나기를 거부하고 1인분만 고수하며 사는 독거인의 삶을 실감 나게 적었다. 난 내가 혼자서 노는 걸 개그로 승화했다. 혼자가 멋지다고 폼 잡는 글이 아니었다. 혼자가 얼마나 지지리 궁상인지,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글을 썼다. 별거 아닌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글이었다. 일종의 팬터마임에 가까운 모놀로그였다. 


 난 집안 청소를 어디까지 미룰 수 있는지 적었다. 수건 하나를 일주일 내내 쓰는 방법도 썼다. 설거지 최소화를 위한 냄비 하나로 요리하는 방법을 적은 게시글도 인기였다. 빨래를 덜 하려면 속옷을 입지 않으면 된다는 걸 체험기로 들려줬다. 그 결과 속옷이 얼마나 사람 몸을 보호하는데 혁혁한 역할을 하는지 몸소 보여했다. 어디 그뿐인가. 혼자 다니면 좋은 식당 유형과 볶음밥을 하나 시키면서도 중국집에서 욕먹지 않는 깨알 꿀팁도 들려줬다. 주말 외출은 고작 헬스장뿐이고 라면으로 외로움을 버티는 회사원들이 내 글에 열광했다. 구독자가 쑥쑥 늘어났다. 사람들이 헬스장 샤워실에서 하루 한 번 씻고 세븐일레븐에서 프로틴 음료를 사 먹는 궁상맞은 남자 얘기를 좋아한다는 게 신기했다.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난 내 글에 유머가 있다는 걸 안 것 같다. 유머라는 건 기본적으로 나를 떨어뜨려서 보는 시선이다. 난 늘 혼자서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놀다 보니 결국에는 나 자신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난 처량한 내 삶을 자학개그로 승화시켰다. 이런 요령부득한 글을 중구난방으로 쓰며 집필에 재미를 붙였다. 글쓰기가 혼자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취미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난 나 스스로에게 거리를 둠으로써 그 시절을 버틴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립반윙클의 신부도 사라졌다. 만남 대신 상상을 택한 난 오피스텔 방에서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이라는 내 첫 원고를 완성했다. 다행히 파주 근처 출판에서 출간 제의가 왔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지금 날 프리랜서 작가로까지 이끌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독서모임 업체를 차린 지금도 파주 자취방에서 편의점 학생이 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립반윙클의 신부와 톡을 하던 나를 떠올린다. 말 한 번 걸어본 요량이 없고, 누구도 만나기를 겁내하던 나는 여전히 관계에 서툴고 누군가와 만나는 걸 버거워하는 어른 역할에 미숙하다난 이런 외톨이 기질이 작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자위한다. 어쩌면 내가 립반윙클의 신부와 만나지 않은 건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그런 식으로 외로움을 처리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뇌과학 책을 보니 기억이라는 건 지난번 기억을 떠올렸을 때를 다시 기억하는 복사 행위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체험의 복사가 아니라, 마치 소문이 전해지는 것처럼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과장과 왜곡, 훼손과 축소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난 원형과는 멀어진 기억을 글로 옮기면서 과거를 미화하는 글을 쓴다. 오늘도 난 파주의 한 동네를 떠올렸다. 오피스텔의 한기와 편의점의 노란 불빛을 글로 적었다. 그때 그 동네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대도시에 없는 나른하고 한적진 기운이 얼마나 사람의 온기를 그립게 하는지 실감 나게 적었다. 동네에 분뇨 냄새가 진동해서 진저리를 쳤던 기억 한 문단. 저 멀리 보이는 철책 근처에 있던 울창한 편백나무 숲도 한 문단.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뒷굽이 다 까진 운동화 한 문단. 난 지금 낯선 도시에서 운동에세이를 쓰며 살고 있지만, 간혹 파주를 글로 소환한다. 날 지켜주는 여자친구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우쳐주지만, 난 알고 있다. 내가 혼자서 글을 썼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글을 쓰며 살 수 있다는 걸. 그때 고독함을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금은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며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이해할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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