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Nov 09. 2023

모임 중독자의 간헐적 친구들

 난 모임 중독자로 살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별 모임을 다했다. 독서모임 진행자, 영화모임 호스트, 글쓰기 모임 리더, 러닝크루 모임장까지. 난 진행에 익숙했다.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에 열광했다. 말 그대로 열광이었다. 밍밍한 삶에 맵고 뜨겁고 짠 기운이 들어찼다. 달력을 펴보면 회사 일정이 아닌, 오직 모임을 위한 시간만 가득했다. 모임을 위해 책을 들고 다니고, 모임을 위해 극장을 찾았다. 뒤풀이 장소를 물색하러 혼자 가보기도 하고, 러닝 코스를 사전 답사하는 짓도 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취향을 가꾸는데 그토록 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내가 나 스스로도 이상했다. 난 내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십 년을 시간을 보냈다. 습관이자 일상으로 커뮤니티에 속한 삶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모임 중독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은 내가 모임에 쏟는 열광이 희귀병이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생각보다 나 같은 종이 많네?


 회사에서는 인간관계를 닫았다.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왔던 선후배가 많았지만 문을 걸어 잠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회사에 마음이 뜨니 모든 접근을 쳐냈다. '어이 박 대리 오늘 삼겹살 어때? 내가 살게.' 사무실을 옮기고 선배가 이렇게 청했을 때, 난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참석해서 관계를 잘 닦아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상 후배가 별 이유 없이 선배의 제의를 쳐내선 안되었다. 하지만 난 하루 앞으로 다가온 독서모임 발제문을 위해 그의 제안을 뿌리쳤다. '선배님, 죄송한데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일면 사실이었지만 죄책감이 드는 말이었다. 정말 그게 사무실의 정치학보다 중요한 것인가. 모임이 내 생계를 책임지는 직장 생활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뭣이 중헌디!' 난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내가 맡은 일만 잘하면 되지. 퇴근하고 관계까지 신경 써야 해?' 그렇게 쿨하게 답하고도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난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사무실에서 시킨 일만 다 한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건 더 잘 알잖아. 넌 그냥 회사 생활을 놓기 시작한 거야.' 처음만 어려웠지, 그다음부터는 노골적으로 퇴근 시간만 되면 혼자 나서는 자가 됐다. 어느새 난 사무실에서 말이 없고 퇴근하면 유령처럼 빠져나가는 존재감 없는 직원이 되었다. 승진에서도 점차 멀어졌다. 


난 모임이 더 중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임 하면 살만했다. 적은 돈을 받고도 만족스러웠다. 먹고사는 돈은 직장에 주는데 난 고작 3시간에 10만 원 하는 아르바이트직에 충성하는 꼴이었다. 거기에는 새로 만난 관계가 주는 북돋음이 있었다. 날 고양시키는 관계가 내 대화를 충만하게 했다. 일본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강한 유대’보다 ‘약한 유대’가 우리 인생에 더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우연한 만남을 찾아 나설 것, 낯선 공간을 여행할 것, 인터넷 검색 값을 배반할 것, 예컨대 잘 아는 사람보다 그냥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잘 아는 식당보다 들어본 적 있는 식당이 많을수록 가능성이 열려 있는 뜻밖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은 긴밀한 유대 관계보다 약한 유대 관계에서 더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다. 혈연, 학연, 지연, 회사처럼 선택적 비위가 좁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끼리의 강력한 결속에서는 비슷한 정보와 방법만 공유되지만, 즉흥적 연결로 이루어진 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정보와 방법이 공유되는 탓에 주고받을 영향이 많다는 것이다. (릿터 2017 8/9호 인용) 난 내 정체성을 일면 숨긴 채 그들 앞에서 취향을 나눴다. 그냥 아는 사람들은 날 오직 대화로 판단했다. 내가 진행하는 모임을 양질의 작품과 곁들어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내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평소에 주변에서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모임에 푹 빠지면서 생활 패턴, 사고방식, 직업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 속에 나 자신을 던졌다. 직장에서 말수가 적은 나는 모임만 시작하면 리더라는 직함을 달고 무수한 말을 쏟아냈다. 그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왓챠피디아 상위 0.02%의 드넓은 취향을 자랑했다. 다음 날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어도, 곧 있을 승진 시험도 내겐 다 소용없었다. 모든 쓸모는 다 모임에 있었다. 내가 더 건강해졌고 불행이 그득한 삶에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다줬다. 잘 해내고 싶었고 실제로 그 누구보다 잘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만난 사람들이 지금도 가장 친한 이들이다. 아는 사람을 넘어서서 옅은 유대를 뒤로하고 내겐 큰 의미가 생겼다.


 나도 원래는 그냥 모임 멤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임에서 다루는 작품을 내가 고르고 싶어졌다. 모임에서 하는 대화 방향을 내 의도대로 이끌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모임이 잘 굴러갈지 노력하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다. 게다가 일정액의 활동비를 받고 모임을 더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간혹 멤버 중에 그 돈 받고 뭐 하러 직원 대신 일을 해주냐는 분도 있었지만 모르는 소리였다. 돈도 받고 모임도 즐길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 과정에서 모임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떻게 하면 커뮤니티에 사람들이 모이는지 고민할 수 있었다. 재가입률을 높이기 위해 다음 모임 예고를 하고, 사람들 간의 유대를 바탕으로 오래가는 모임을 만드는 방법도 차차 배웠다. 그게 지금 내가 커뮤니티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내게 모임 친구들은 그냥 한 달에 두세 번쯤 만나 대화하고 같이 밥 먹는 간헐적 식구와 같았다. 나는 내 공간과 시간이 중요해서 맨날 같이 밥 먹고, 같이 어디 가고 하는 관계가 싫었다. 할 게 너무 많았다. 일 쳐내고 내 취향 가꾸기도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모임 멤버들은 내 외로움을 상쇄해 줬다. 서른 살이 넘어가면서 또래 친구들이 결혼을 해대기 시작했다. 내 카톡 리스트 대화방이 하나둘씩 날아갔다. 그들의 웨딩 사진과 아이 사진이 우리 관계를 밀쳐냈다. 인생의 변화는 각자의 시간과 주의를 빼앗을 뿐 아니라 전에는 몰랐던 친구와 난 사이의 골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정의 흥망성쇠를 겪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내 삼십 대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이 예전 친구들의 자리를 대체했다. 책과 영화 그리고 글쓰기로 느슨하게 연결된 일상이 시작됐다. 날씨가 좋거나 석양의 맥주 한잔이 생각나면 난 종종 독서모임 멤버들을 불러냈다. 서로 좋아하는 하는 취향의 비무장지대를 열어두고 딱 내보이고 싶은 만큼만 드러내고 허용 가능한 만큼만 다가가는 관계에서 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그건 나를위함이라는 커뮤니티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이전 13화 궁상맞은 글이 도움이 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