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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31. 2016

수전 손택

현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다크레이디

 글을 쓸 때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다. 백스페이스를 연타하며 한숨을 쉬기 일쑤다. 그럴싸한 착상도 막상 글로 풀면 볼품없이 흩어지고 만다. 삶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데 반해 글은 더디고 미진해서 힘에 부친다. 하루는 눈 깜빡할 새 흘러가지만, 내 글은 수 없는 마침표를 찍고서도 깜깜무소식이다. 벌건 눈으로 커피를 들이켜며 조잡한 초고를 만져봐도 패배감만 베어진다. 인식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작가 흉내라도 내보려 아등바등하는 꼴이다. 그래서 소설가 커트 보니것이 이런 말을 남겼나 보다. “나는 글을 쓸 때, 입에 크레용 하나를 물었을 뿐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처럼 느낀다.” 나는 이렇게 사지가 절단되어 나뒹굴 때 서점으로 향한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일급 작가가 쓴 문장에 밑줄을 치며 안식을 찾는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쓸 수 있기를 소망하며 힘을 낸다. 그런 기라성같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수전 손택은 치밀한 문장으로 저만의 둑을 쌓은 작가의 표본이다. 강철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다. 


 하루에 한 번 인스타그램을 켠다. 손가락을 놀리며 사진을 본다. 종종 내 사진도 하나 띄운다. 가장 잘 나온 놈으로 골라 필터까지 씌우곤 히죽히죽. 이미지 과잉 시대라고 한다. 어느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며 일갈했지만, 막상 방금 나온 커피를 찍어 올릴 땐 스스럼없이 편승한다. 문제의식을 느낀 건 아니다. 그저 버릇처럼 사진의 자극에 휘둘림에 불편하다. 난 책을 사랑하지만, 곧 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어느 학자에 동조한다. 이미지만큼 편리한 언어가 있을까. 웃는 이모티콘 하나면 기분 최고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쓰다가 톡이 오면 급한 맘에 엄지 척 이모티콘을 누른다. 짐짓 의연한 척해봐도 이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울적해진다. 내게 글로 서술되지 않는 세상은 가상이다. 어쩌면 책은 때 지난 레코드판을 고가에 매입하듯 아날로그의 흔적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전 국민이 사진작가인 요즘 시대에는 사진 한 장이 온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사진을 그만큼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로 여긴다. 하지만 작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고 나면 사진은 편집된 사실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수전 손택은 사진엔 맥락이 거세되어 있으며, 사태를 호도하는 거짓 헤드라인 그 이상이 될 수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사진이 샷(shot)을 통한 프레이밍으로 피사체를 조정할 때 수많은 정보가 소실되기 때문이다. 대중은 사진을 철석같이 믿지만, 오직 제한된 정보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당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사진이 진짜 당신이 아닌 것처럼 사진은 곧이곧대로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사진작가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는 저널리즘 윤리를 말할 때 주로 인용되는 사진이다. 독수리가 굶주린 흑인 소녀를 노려보는 이 사진은 언론인에겐 최고 영예인 퓰리처상을 안겼다. 하지만 대중의 심판대에 오른 그는 몇 달 후 자살한다. 대중은 사진만 보고 왜 아이를 먼저 구해내지 않았냐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정치적 혼란으로 곤궁했던 수단 문제를 국제사회에 환기했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 전체가 직면한 식량난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로써 다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사진 한 장으로 얼마만큼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수전 손택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닌 콘텍스트를 보려고 한다. 저널리즘에 입각해서 사진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프레임 밖 현상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강조한다. 고로 사진은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매개에 불과할 뿐 단일 정보로 설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수전 손택은 복잡하고 강퍅해 보이더라도 글이란 촘촘한 사유를 통해 진실에 다가서야 하는 매체임을 강조한다. 수전 손택의 대표작 <타인의 고통>은 그녀가 사회의 폭력과 싸워간 투쟁의 기록이며, 매 문장 누군가의 고통을 상상하는 힘을 만들어낸다. 저 사진 속 목숨이 위태로운 아이가 내 삶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증명해낸다.


 <타인의 고통>을 읽으며 줄곧 생각했던 건 지식인의 책무다. 수전 손택은 글 곳곳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속해서 생각을 허물고 새로 세우는 작업을 반복한다. 자신이 썼던 문장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다시 새로운 논지를 세워나간다. 그러면서 원칙에 붙잡혀 게으른 주장을 반복하는 학자엔 각을 세운다. 그를 보고 있으면 지식인이란 늘 다시 생각해보고 항상 '새로고침'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결국, 좋은 글이란 원칙의 단단한 암석 아래 놓이는 게 아니라 늘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 벽돌과 같은 게 아닐까.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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