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된 욕망과 함께 살아가는 페미니스트
주말이면 서점에 가 문학도라면 능히 읽을만한 책을 고른다. 드높은 명성과 그만큼 난해하다는 악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딱딱한 표지를 만지며 감격한다. 너를 매일 밤 침으로 흠뻑 적시더라도 우리 끝장을 보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계산한다. 책을 고를 때 이름값을 따지다 보니 늘 명사의 추천에 귀가 펄럭인다. '지식인의 서재'에 나온 필독서를 기웃거리고, 노벨문학상 부커상 퓰리처상 공쿠르상 같은 이력으로 책의 우열을 가린다. 알려지지 않은 책은 등한시하고, 대문호의 품에서 아양을 떤다. 그렇게 책장에 꽂아두고 방치한 책이 한 트럭이다. 엄마는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줄 알고 의아해하신다. 책을 많이 읽으면 분명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이 된다고 믿으시는데, 난 여전히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후비는 어리석은 아들일 뿐이다. 나처럼 허영심으로 책을 접하게 되면 시대의 화두를 다룬 책에 무감해진다. 현실이 가리키는 바를 성실히 기술하는 요즘 작가와 멀어진다. 이왕이면 어디 가서 뽐내기 좋은 책만 고르니, 막상 주위 사람들이 가진 문제의식을 둘러보지 못한다. 고매한 지성의 가르침에 정신이 벙벙해서 시대의 고통을 살피는데 게을러진달까. 요즘 감수성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감수성은 타인에 대한 반응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능력으로, 예민하게 타인이 어떻게 느낄지 상상할 수 있는 태도다. 불편하고 귀찮다고 지끈거리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지각변동을 외면한다면 감수성 부족에 따른, 차별과 혐오에 무뎌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록산 게이는 암암리에 상처를 받은 이들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작가다.
작가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난 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유머러스한 말투를 좋아한다. 그녀는 글을 끝내주게 쓰지만, 무엇보다 말을 할 때 신뢰를 얻어낸다. 타고난 강연자인 셈이다. 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신뢰와 호감을 얻는 그를 시샘한다. 내가 본 강연은 그의 저서 <나쁜 페미니스트>를 요약한 내용이었다. 마치 족집게 강사처럼 책이 가진 컨셉을 한눈에 정리해준다. 누구나 꺼내기 불편해하는 소재를 능숙한 유머와 멋들어진 묘사를 통해 광장으로 이끌어낸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이 있다. 록산 게이는 그 손사래 속에 "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 그쪽에 관해 지식이 없어요"라는 뉘앙스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라면 왠지 남자에 반감을 갖고 사회에 일갈하는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뭔가 아는 척하는 것 같고, 권위 있는 딱딱한 말을 보태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 이는 페미니즘을 하나의 자격으로 끌어올려 문제를 어렵게 한다. 마치 잘나고 뛰어나지 않으면 페미니스트를 할 수 없다는 그릇된 인식을 준다. 한국만 해도 페미니스트에 온갖 잣대를 들이댄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청한 이가 뭐라도 실수하면 비난하기 일쑤다. ‘지 인생이나 똑바로 살고 페미니스트 노릇을 해야지 쯧쯧.’ 하지만 누구도 왜 페미니스트가 한 개인의 과오와 같은 선상에서 다뤄져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페미니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한다. 록산 게이는 말한다. 누구나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누구나 허언을 뱉을 수 있다. 흘리고 사는 게 인간이고 페미니스트라고 거기에 예외일 수 없다. 당위를 자격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페미니즘이라는 삶의 양태를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터놓고 얘기해야 마땅하다. 페미니스트를 마치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취급한다면 이보다 더 복잡한 담론을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는 책은 ‘나쁜’ 보다는 ‘미숙한’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빠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페미니즘을 화두로 끌어올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시대의 과제로 페미니즘이 공개된 장소에서 다뤄지지만,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에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인터넷 전쟁이라는 말을 서태지가 가사에 쓴지도 이제 15년이 넘어갔다. 전쟁은 지금도 한창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전장은 역시 젠더와 세대의 영역이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서인지 여성 혐오와 남성의 박탈감이 만연하다. 노인을 혐오하고 청년은 기득권에 피해의식을 가진다. 한남충, 김치녀가 국어사전에 올라가도 될 만큼 보편 용례로 자리 잡은 지금, 우리는 어떻게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상대 눈을 마주하며 얘기할 수 있을까. LGBTI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기겁을 하면서, 어떻게 스스로 성 정체성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나. 서툴러도 괜찮으니 편하게 얘기해야 마땅하다. 록산 게이는 쉽고 단호히 세태를 적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