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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0. 2020

상처받은 척 흉포하게

왓챠 <도그빌>

 우울할 땐 억장이 무너지는 영화가 좋다. 방이 쓰레기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 없어도 끄떡없다. 우선 영화를 켠다. 비실거리는 전등 빛에 의지해 라면을 먹다 말고 노트북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몰입에 구원이 있다. 저 허구 속 세상이 내일 내가 맞이할 아침일지도 모른다고 주문을 건다. 그때 혼돈에 빠진 인물이 나타나 헉헉거리며 정처 없이 어느 낯선 마을을 헤매고 있다. 난 그가 바닥을 치고 나자빠지길 고대하며 눈에 불을 켠다. 영화 제목은 <도그빌>. 난 어느 유튜버 덕에 결말을 알았지만, 총질이 가득한 학살을 고대하며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그리고 마침내 트림하듯 거친 살육이 시작된다.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진다.

 영화를 다 봤으니 줄거리를 요약해보자. 로키산맥 작은 마을에 선량하게 보이는 주민들 곁에 낯선 공주님이 찾아온다. 이름은 무려 그레이스. 전성기 시절 니콜 키드먼을 기억한다면 그녀가 얼마나 투명하고 섹시한지 잘 알겠지. 가구 8채뿐인 비좁은 촌구석을 헤매던 그녀는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 틈으로 파고든다. 거지꼴을 한 주민들은 마음씨 좋게 생기긴커녕 수상쩍어 보인다. 겁은 많아서 이방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녀는 메리 포핀스 저리 가라 할 일솜씨로 결국 주민들 마음을 사로잡고, 그 과정에서 톰이라는 녀석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톰은 그녀에게 마을에 더 잘 정착하려면 주민들을 더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더 열심히 일하지만, 예상과 달리 주민들은 그녀의 노고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부당거래의 명대사가 생각나는 뻔뻔한 사람들. 톰이라는 놈은 남편이라도 된 듯 행세하지만, 입만 살았지 제대로 돕는 게 없다. 그렇게 그레이스는 갖은 고생을 하며 집도 마련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마피아가 그녀를 수배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지명수배가 붙어있고 현상금까지 걸려있다는 걸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숨겨주는 대가로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아니 노동을 넘어 폭력과 성 착취도 마구 저지른다. 선의와 자정작용은 요원하고, 오로지 합리화로 이루어진 악행이 판을 친다.

 고통을 받던 그레이스는 결국 마을에서 도망치지만 붙잡히고 만다. 목줄로 채워진 채 감금되기에 이른다. 폐쇄 집단이 비이성적으로 왜곡되는 광경은 익숙하다. 매 주말 <그것이 알고 싶다>에도 자주 나오지 않나.  그레이스는 착한 건지 그냥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지, 내가 노력하면 그들도 알아주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폭력을 견딘다. 평범한 사람이 무구하고 수줍은 얼굴로 악행을 저지르는 광경은 기이하다. 라스 폰 트리에는 명성에 화답하듯 인간이 얼마나 불가해한 이유로 악해지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해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거기에 자칭 철학도에 작가라 불리는 톰이 선의로 포장된 바보짓을 일삼을 때, 우리를 구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류의 지성도 별다른 자성 없이 무너지는 꼴을 목격한다. 말만 그럴싸한 책 속 내용은 현실에서는 무용하다. 요즘과 같은 파놉티콘에 가까운 겹겹의 감시가 오히려 그리워지는 기이한 영화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참혹한 고난을 겪고 있던 차에 다시 지난번에 마을을 찾았던 마피아가 마을을 기웃거린다. 알고 보니 그들의 두목은 그레이스 아버지였다. 노친은 딸이 가출하자 온 마을을 뒤지고 다니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위해 가출했다가 시골 마을에서 이 꼴을 당하고 있었던 거다. 그녀는 사람들의 선함을 믿고 기다리고 있다고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에게 한심하다는 투로 말한다. “너는 정말 오만하구나.” 뭐가 오만한 걸까. 아비는 그녀가 성자 역을 자임하고 마을 사람들을 굽어보며 제 아량과 지성을 뽐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아직 교화되지 않은 미개한 인간으로 보았던 건 아닐까. 마을 사람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변호하듯 말했지만, 사실 속내는 자신과는 급이 다른 인간들이니 미개함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나. 이런 그녀의 태도를 아버지가 적시했을 때 그녀는 복잡한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마을을 한번 둘러본다. 그리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들의 추악함을 깨닫는다.

 그녀의 지시로 갱들은 온 마을을 학살하고 부순다. 다시는 복구할 수 없도록 깨끗이 도륙한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하나씩 죽이라는 잔인한 지시까지 곁들인다. 작은 마을에서 온갖 수난을 당하고 갇혀 있던 울분을 단숨에 풀어내기라도 하듯 자신을 감금하고 폭행했던 인간을 소탕하는 장면이 속 시원하다. 마을 사람들이 사라져 마땅한 이들이고, 그들이 엄연한 악이라 정의하면 속은 편해진다. 세상의 모든 학살이 그랬던 것처럼 당위는 죄책감은 앗아가고, 악을 처단하라는 정언명령에 취해 머뭇거림 없이 칼날을 휘두른다. 


 나 역시 고통받는 자리에서 고난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전에 모셨던 부장님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는데, 온 직원들이 내가 복도에서 지나칠 때마다 날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난 어느 순간 피해자 역할에 몰입해서 더 불쌍한 얼굴을 했다. 폭언과 부당한 지시에도 야근을 도맡아 하고, 동료들에게 고생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건강이 안 좋다고 엄살을 떨었다. 사람들이 내 노고를 알아준다는 착각으로 그 시간을 버텨냈다. 지금은 '버틴다'라는 단어를 적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피해자 코스프레에 익숙해져선 관심을 받는 데 심취했던 것 같다. 살이 빠져가는 나를 스스로 대견해하고, 격무에 목을 주무를 땐 묘하게 짜릿한 기분에 젖곤 했다.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느낌이었고, 이 조직이 평안하고 주변 사람들이 행복한 것도 다 내 덕인 듯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고, 사람들은 고통받는 척하면서 윗사람에게 아첨을 떠는 날 못마땅해한다는 걸 알았다. 타인의 위로와 공감은 사회생활이 가져다준 허상에 불과했다. 결국 모든 과오는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피해자 자리에 머물고 대가를 기대한 내 탓이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도 저녁에 뜨스한 방에서 차 한잔 정도 할 수 있을 때 지속할 수 있는 법이다. 나도 결국 얼마 못 가 몸이 고장 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한직으로 발령을 냈다. 어느 날 저녁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밖에서 재밌게 놀다가 2차를 가는 동료들을 봤다. 분명 내게는 별말이 없었는데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가을밤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뭘 위해 이리도 아등바등하지.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다 끝났다고 말할 때 들어야 한다. 심지어 상대마저도 끝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집착하면 훗날 민망함에 고개 숙일 날이 오고야 만다. 보지도 않는 메시지를 보내고, 감상적인 음악을 늘어놓고 자위해봤자 나만 우스워지는 거지. 이때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모든 사례는 다 영화에 있었다. 킬링 타임으로 튼 영화에서 죽이는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다. 시공간이 나와 무관하고 처한 상황이 달라도 어떻게든 거기서 내 모습을 발견해서 교훈을 찾아내는 게 내 특기니까.

 나는 혹시 그레이스에 이입해서 고통을 느꼈을까. 타인의 고통에 머무른다는 건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그것이 예술이 지닌 효능이라고 칭하곤 한다. 하지만 혹시 내 마음 편해지자고 약자 노릇을 자처한 건 아닐까. 그 앞에서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봐달라고 말해봤자, 그 눈에 나는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는 한심한 작자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본지 한참이지만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지시하는 그레이스의 냉혹한 얼굴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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