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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7. 2021

작별을 고하는 노력

넷플릭스 <북촌방향>

 한때 장편영화를  편이나 연출했으나  말아먹고 지금은 대구의 어느 대학에서 강의나 하며 그럭저럭 사는 성준은 서울에 놀러 왔다가  고갈비 집을 찾는다. 우연히 낯선 사람들과 거나하게 취해서, 저도 모르게 과거의 연인 예전의 집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경진은 고덕동 어느 낡은 4층짜리 주공아파트에 사는 여자다. 경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성준이 당혹스럽지만 그를 집에 들인다. 경진은 궁금했다. 왜 자신을 그렇게 갑작스레 떠났었는지, 그리고 무슨 염치로 다시 찾아왔는지. 하지만 그는 끝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얼버무리고, 전처럼 맹목적인 구애와 함께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다음 날 아침 경진은 끊었던 담배 몇 개비를 빌리고 더는 그와 연락하지 않기로 한다. 경진은 성준에게 있어 과거에 내 처진 존재다. 현실 세계에선 사장된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만나봤자 고작 추억팔이나 하며 희박한 공기에 울부짖을게 뻔하다. 그와 다시 만나도 지금처럼 망가질 게 뻔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과 몸이라는 게 어떻게 그렇게 단호히 끊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얼마 못 가 텔레비전 소리만 하염없이 흐르는 낡은 아파트 거실에서 성준에게 몇 통의 문자를 보낸다. 성준이 경진과 꼭 닮은 술집 여주인과 시시덕거리는 것도 모르고 속도 없이.


 성준은 경진의 문자를 받고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렇게 잊힌 사람이 되었다. 고작 술이나 먹고 몸과 마음이 동할 때 찾아갈 수 있는 하루치 인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흑백 화면에 칠흑 같은 밤을 보낼 경진의 집을 더는 살피지 않는다. 두고두고 못내 마음이 쓰일 장면이다.


 성준은 경진의 집을 다녀온 며칠 후 절친한 영호 형과 자신의 첫 영화 주연이었던 중원이 형을 만난다. 그리고 영호 형이 많이 아끼는 후배 보람을 만나서 어울린다. 네 사람은 이튿날 함께 북촌의 어느 골목에 자리한 술집 '소설'을 찾는다. 성준은 그곳에서 경진과 지나치게 닮은 여주인을 마주친 후 눈을 떼지 못한다.

 예전은 혼자 술집을 운영하며 산다. 나이도 있고 얼굴도 예쁘지만, 어쩌다 보니 혼자 가게를 지키는 신세다. 술집은 외진 골목에 있어 그녀의 얼굴처럼 마르고 창백해 보인다. 단골 장사만 하는 술집이다 보니 늘 쪼들려 곧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은 한옥집 구조에 주방 옆에는 하꼬방도 끼고 있어 예전은 집보다는 가게에서 지내는 편이다. 가게엔 생뚱맞은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고 값이 꽤 나가 보이는 고풍스러운 가구들도 눈에 띈다. 그녀는 대체 어떤 길을 걷다 이런 가게에 다다른 걸까. 그녀는 경진과 얼마나 닮아있을까.

 예전은 오늘 단골손님과 데이트를 하다가 늦게 가게 문을 열었다. 그녀는 여러 남자를 만나지만 심각한 관계를 맺진 않는다. 그저 이 긴긴밤 등을 쓰다듬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영호 일행이 그녀보다 앞서 도착해 술을 마시고 있다. 주인도 없이 카스 몇 병과 소주를 늘어놓고 땅콩 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얘기를 나눈다. 놀란 그녀는 염치가 없어 급히 안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눈치로 보니 보람은 성준을 좋아하는 것 같고, 영호는 보람에게 관심이 많다. 중원이라는 사람은 성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인데.

 예전은 재료가 다 떨어져서 마트에 장을 보러 가려던 차,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성준과 마주친다.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예전도 이 젊은 교수에게 호감을 느낀다. 수줍음을 타면서도 피아노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는 그가 범상치 않아 보였을 것이다. 대차게 춥고 눈이 펑펑 오는 밤, 두 사람은 같이 장을 보러 갔다가 북촌 어느 골목에 서서 긴 키스를 나눈다. 추위가 다 잊힐 만큼 아득한 기분이 드는 키스였다. 냉동만두를 든 성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예전의 얼굴에 경진이 겹쳐 보이는 걸까. 성준은 그녀에게 같이 밤을 보내자고 제안하고, 예전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 며칠 후면 헤어질 사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 컴컴한 밤을 그와 보내기로 한다. 긴긴밤 뭐하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꽤 오랫동안 어떤 것에 작별을 고하려 애써왔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노력이다. 이야기는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노력에 있는 것이다. (폴 오스터, 뉴욕 삼부작 330p.)


 배우 김보경 씨가 세상을 떠났다. 최근 활동이 없어서 궁금하던 차에 단신으로 실린 부고 기사를 접했다. 긴 투병을 해왔다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영화 <친구>나 드라마 <하얀 거탑>으로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난 흑백영화 <북촌방향>으로 그녀를 떠올린다. 1인 2역의 예전과 경진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본지 한참이 지났지만 늘 마음에 두는 이름이다.

 그녀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모든 이에게서 잊히고, 남김없이 흩어져 무명의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지도. 그런 배우들이 어디 한둘인가. 한땐 절실했던 인연도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어쩌면 나조차 그녀가 맡은 작은 배역 따위는 변변하게 떠올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까지 그녀에 관한 기억을 남기는 것은 그녀가 영화 속에서 칠흑 같은 밤에 지어 보였던 표정을 잊지 못해서다. 그건 영구적으로 내 가슴에 볼록하게 패인 자국을 남겼다. 그걸 굳이 글로 적는 게 어떤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어떤 장면은 훗날에도 남을 것이다. 다른 말과 생각은 전부 사라져도, 운이 좋다면 약간의 말과 함께 곁을 지킬 것이다.

 많은 일이 반복되고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란 게 어떻게 흘러갈지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냥 가끔 몇몇 장면들을 내 손으로 붙여놓고 보고 싶을 뿐이다. 제스처에 불과한 기억이 아우성을 치며 나 좀 봐달라고 거기 내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고 말을 걸어온다. 폴 오스터의 말대로 작별을 고하려 애써본다. 외롭지 않은 곳에서 부디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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